[출처 : 직접 작성 + 조선왕조실록 + 두모포의 정체 뉴스]
파주 교하읍에 파평 윤씨네의 묘소가 많이 있고, 그곳에 정난정의 묘도 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몇 번 돌아다니며 찾은 적이 있다. 그러다 간신히 윤원형의 묘를 찾았고, 윤원형의 묘역 오른쪽 뒤편에 "정윤겸의 서녀 초계 정씨 난정지 묘" 라고 쓰여 있는 조그만 비석이 있고, 야트막한 봉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바로 옆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파평 윤공 원형지 묘"라고 기록되어 있는 윤원형의 묘가 있다.
보통의 경우 본부인이 합장을 하는 데 어찌 되었건 당시는 정난정이 윤원형의 본부인이라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봉분이 작고 첩으로 인정했다면 같은 묘역 안에 봉분을 쓴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2001년에 인기리에 끝난 ‘여인천하’에서 정난정은 끝내 자기 친아버지인 파릉군을 죽이는 것으로 나왔는데 동료 직원 한 사람이 “정난정이 자기 친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면서 나쁜 ”이라고 욕을 하기에, 정말 정난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씨 종친회에 물어보고, 조선 시대 왕족의 족보인 <선원록>에서 파릉군을 찾아보았더니 그 가계(家系)는 아래와 같았다.
[ 조선 3대 임금 '태종" 가계도 中 ]
(1) 서1남 경녕군 - 복성정, 안양부수 옥산, 금릉군 금산 (3남)
(2) 금릉군 금산 - 파릉군 경, 함평령 진 (2남)
(3) 파릉군 경 - 석 (1남)
(4) 석 - 용, 흥 옥 홍 (4남)
파릉군은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로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정난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물론 선원록에는 딸도 기록을 해두지만 경녕군 후손들은 딸을 낳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실록에서 보는 것처럼 파릉군은 중종 시대에 이미 죽었고, 정난정은 다음 다음 왕인 명종시대에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내용이 허구인데 그것을 사실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파릉군의 죽음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등이 처벌을 받게 되자 파릉군은 종친들을 동원하여 조광조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대신들의 의심을 받아 귀양을 갔고, 귀양을 간 지 15년 만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대사헌 이항이 아뢰기를 “파릉군은 조광조 등이 죄를 받던 날, 종친부에 가서 종친을 죄다 모아서 아뢰어 구제하려다가 못하고, 또 대궐 마당에 나아가 한밤에 무리로 모여서 아뢰어 구제하려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저들과 그 죄를 같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안당 등의 일은 대신과 의논해야 하겠으나, 그 죄를 죄다 다스릴 수는 없다” 하였다. ― "1519년(중종 14년) 12월 14일"
이때만 하여도 중종은 파릉군에 대해 처벌할 의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11일 뒤인 12월 25일 아래와 같이 이빈의 주장에 따라 파릉군을 처벌하기로 하고, 당일 해남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빈이 아뢰기를 “이제 들으니 파릉군은 그때 한밤에 종친부에 가서 종친들을 모았으므로 왕자군이 놀라고 두려워 넘어지고 엎어지게까지 하였다 하는데, 그 까닭을 물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종친의 일은 전일 대신을 면대했을 때 다들 불가하다 하여 귀양 보내기를 매우 어렵게 여기므로 고신(임명장)만 빼앗고 말았다. 파릉군이 한 짓이 이러하다면 죄가 과연 중하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빈이 아뢰기를 “파릉군은 다른 종친의 예로 죄를 논해서는 안됩니다.” 했다. 임금이 “파릉군의 일은 매우 놀랍다” 하고 말하자, 유관이 아뢰기를 “종친은 국사에 간여하지 않는 것인데, 파릉군은 그때 종일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의 문 밖에 와 있었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종친이 회포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하겠으나, 파릉군이 한밤에 한 일은 아주 놀랍다”라고 하였다. ― "1519년 (중종 14년) 12월 25일"
그 후 226년이 지난 1741년(영조 22년)에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게 시호를 내리고 벼슬을 복구시켰는데, 파릉군도 시호를 받고 벼슬도 높여 주었다.
[ 정난정의 삶 ]
여하간 여자의 몸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죽었을 때의 기록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정난정은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난정의 신분은 어머니가 관비이고 정난정 역시 천민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실제 신분은 중인계층이었다. 조선시대 중인신분은 조선 초기와 말기의 위치가 달랐는데 조선 중기까지의 중인은 중등 정도의 품격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불렸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중인이라는 특별한 신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대부들로부터 단지 돈 많은 천인이라는 차별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중기 이후부터는 중간 신분층으로 아예 분류가 되었다.
중인들은 성종조부터 연산조까지 급격하게 늘어났다,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확립시키고 성종대부터 조선에는 태평성대가 시작되었는데 연산군때까지 이어졌다,
연산군 시기의 조선은 대외적으로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여줬다, 연산조부터 북쪽 여진족들의 변경침입이 잦아들었고 남쪽 왜인들의 침략도 성종때보다 훨씬 잦아들었다. 대내적으로도 연산군 때의 조선 경제활동이 훨씬 활발했다.
나라가 안정됨으로 인하여 조선에는 많은 재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노비들도 큰 집을 짓고 살 정도로 성종조부터 연산조때의 조선은 매우 풍요로웠던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공경대부들이 사치에 익숙하여 큰 집을 다투어 짓는 것을 일반으로 여겨 재력을 다하여야 그칩니다. 더구나 장사하는 무리와 미천한 노비조차 돈이 있으면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큰 집을 다투어지어 집의 크기와 화려함이 공경대부보다 더합니다. - [성종실록 2년 6월 8일자 기사]
대부분의 사대부들과 심지어 유생들까지 사치가 심할 정도로 당시 조선은 매우 부유하던 시기였다.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 유생들이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곳을 입고 다니면서 책을 갖고 다니지 않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유생이면서 책을 끼고 다니지 않은 사람은 모두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에 처하게 하소서. 근래에 유생들에게 푸른 깃의 겉옷을 입도록 했지만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학교 문을 나서면 곧바로 벗어버리니 선생이 어찌 이를 금하겠습니까, 앞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마땅히 사헌부에서 금해야 하겠습니다. [성종실록 11년 1월 16자 기사]
또한 왕실 역시 사치를 행하였고 여러 번의 사치금지령이 내려졌지만 궁정부터가 사치의 주범이었으므로 실효가 없었다. 연산군이 폐위된 사유 중의 하나가 자주 주연과 연회를 열어 재정을 파탄 나게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때당시는 성종 때부터 이어진 태평성태와 물질적으로 부유하던 시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성종도 재위 25년 동안 3 대비를 위해서 그리고 기타 여러 사유로 수많은 연회를 열었다는 성종실록 기록이 있다. 부왕이었던 성종도 이렇게 수많은 연회와 주연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에게만큼은 부정적으로 보인 것은 의도적으로 연산군을 깎아내리기 위한 승자의 기록일 것이다.
정난정의 외조부 남씨는 미천한 천인 출신이었지만 성종, 연산조에 많은 재물을 모아 중인의 반열에 올랐고, 반정공신으로 책록된 정윤겸에게 재력을 기반으로 하여 딸인 남씨를 차실로 바쳤다. 그러기에 문정왕후도 중인집안 출신인 그녀에게 정1품의 정경부인 직첩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로 희빈 장씨 역시 그녀의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에 중전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했었다. 조선시대에서 중인이 양반대열에 오르는 일은 조선 후기 이후부터 간간히 일어났던 일이었다.
정윤겸은 남씨를 차실로 맞아들여 슬하에 2남 3녀를 낳았다. 정윤겸은 정실보다는 차실인 남씨를 더 아꼈다.
[ 정윤겸과 차실 남씨와의 가계도 ]
1남 - 형(泂)
2남 - 담(淡)
1녀 - ? (원연손(元連孫)에게 출가)
2녀 - ? (신거관(愼居寬)에게 출가)
3녀 - 정난정 (윤원형 (尹元衡)에 출가) - 4남 2녀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차실(次室) 남씨(南氏) 사이에서 태어난 2남 3녀 중에 막내로 태어난다.
그녀가 기생이었다는 내용은 정사기록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그녀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전해질 수도 있지만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외조부인 남씨와 정윤겸이 부유한 집안이었을뿐더러 그녀의 언니들도 모두 사대부집안으로 출가하였으므로 차실 남씨를 비롯한 그녀의 자녀들은 차별을 받고 성장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 정윤겸으로부터 각별한 대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이다. 정난정이 그런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기생이 될만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 남씨의 경우처럼 정윤겸 집안과 윤원형 집안과의 동맹을 위해 정략적인 혼인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이들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난정을 중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아 이에 감동한 정난정은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충견을 자처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하려고 한 사건으로 인하여 김안로는 실각하고 사사되는 과정에서 연안 김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윤원형의 처이자 김안로의 조카였던 부인 김씨의 입지는 줄어들게 되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동생인 윤원형도 소윤의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자연스럽게 그녀도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명종 4년 9월 6일, 정난정의 자녀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허통법이 통과되었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종실록 9권, 명종 4년 9월 6일 임신 2번째기사]
조종조로부터 큰 공로가 있으면 첩의 자녀를 허통 한 전례가 있으니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윤원형의 승품(陞品)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아뢰었으나 위에서 난색을 보이셨는데, 이제 승품 시키소서. 그리고 친공신(親功臣)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적은데 안세우가 마침 올라왔으니 경관(京官)을 제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세우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서원군의 첩의 자녀에 대하여 이미 허통 시켰으니 승품은 급히 서두를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기 등이 또 아뢰기를, "첩의 자녀를 이미 적으로 만들었는데 승품은 어찌 그리 아끼십니까? 공로가 서원군만 못한 자들도 다 2품에 올랐는데 큰 공이 있는 사람 혼자만이 오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꺼번에 갑자기 승진시키는 것은 본인에게 다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기 등이 또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명종 6년 2월 4일, 윤원형은 부인 김씨가 덕이 부족하고 악행을 일삼아 그녀가 정실로서 합당치가 못하므로 내칠 것을 명종에게 상소하였는데 이를 받아들였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 2월 4일 임술 5번째 기사]
"서원군(瑞原君) 윤원형(尹元衡)이 상언(上言)하여 그의 처(妻) 김씨(金氏)의 악행(惡行)을 극력 진달하고 버리게 해달라고 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원형은 폐첩(嬖妾)에게 현혹되어 적처(嫡妻)의 자리를 빼앗아주려고 은밀히 계획하더니 마침내 조강지처를 버렸다. 그것이 차마 할 짓인가?"
비록 어린 명종의 허락하에 윤원형은 정실 김씨를 내치는 데 성공하였지만, 당시 조정은 성렬인명대왕대비 윤씨(문정왕후)의 수렴청정시기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성렬인명대왕대비 윤 씨"의 윤허를 받아 정실 김씨를 내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부인 김씨의 외숙인 김안로가 중종 재위시기에 권력을 장악했고, 그 위세로 당시 중전이었던 윤씨를 폐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중전 윤씨의 읍소로 발각되어 1537년 결국 김안로는 실각하여 사사되었는데, 그 이후로 중전 윤씨는 연안 김씨 집안과 감정이 안 좋았고 윤원형이 김씨 부인 폐출 상소를 올리니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
정실인 김씨 부인이 내치고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김씨의 죽음에 대해서 정난정이 김씨 부인을 독살했다는 심증만 무성했을 뿐 증거자료는 어디에도 없었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총애를 받는 정난정을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훗날 정난정이 정실 김씨를 독살했다는 소장이 접수되어 정난정의 노비와 하인들이 의금부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았는데 이들은 이전에 정실 김씨를 모시던 노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난정을 감싸다 죽었다.
그리고 야사에서는 정난정이 김씨 부인을 독살한 후에 정난정의 어머니 남씨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조시대에 판중추부사 벼슬을 하다 죽은 정종영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 8월 1일 1번째 기사 ]
그는 정윤겸의 손자로 정난정에게는 서조카가 된다. 정난정의 남편인 윤원형이 정종영이 당시의 실력자인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해치려 하니, 정난정의 어머니가 “우리 집의 종손은 건드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정종영 생존 시까지 남씨가 윤씨 집안일에 간여한 것으로 보면 정난정의 곁에 계속 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차실 남씨도 이미 정난정처럼 정씨 집안의 실질적인 안주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난정 곁을 떠났다는 기록과 정실 김씨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앞뒤 정황을 볼때 윤원형과 정난정의 정책을 질타한 사대부들의 조작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정실 김씨가 독살을 당했다면 누가봐도 정난정이 의심을 받을 것인데 정난정이 그런 일을 사서 벌린다는 것도 납득하기가 힘들고, 또한 이런 혐의가 있는 정난정에게 성렬인명대왕대비 윤씨도 쉽게 정실로 올리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살설에서는 정난정이 정실 김씨를 독살하고 정실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원형이 정실을 내쳐달라는 상소를 올려 폐출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그대로 있으므로 문정왕후의 윤허를 받아 정실에서 폐출된 김씨를 정난정이 굳이 독살하는 과오를 남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첩이 정실을 독살했다는 정황이 확실하다면 정실로 올라가기 보다는 오히려 윤원형, 문정왕후에게 버림받고 그녀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 올바른 수순이 아닐까 싶다. 독살했다는 물증이 있는 정난정을 왕실가문이 된 윤씨 가문에서 받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윤원형이 문정왕후와 명종의 윤허하에 정실부인 김씨를 내치자 정난정은 자연스럽게 실질적인 안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명종 8년 3월 14일 문정왕후는 동생인 윤원형을 을사사화 2등 공신에서 1등 공신으로 정정하여 올려주었고 정난정에게도 외명부의 첩지를 주어 정실로 신분을 올려주었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3월 14일 경인 2번째 기사]
정원에 전교하니 "지난 을사년에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조정(朝廷)이 이반(離叛)하였으나, 하늘에 계신 조종의 도움으로 종사가 다시 안정되었다. 그때 윤원형(尹元衡)의 막대한 공은 1등 공신에 책록(冊錄)할 만하였으나 본인 스스로 사양하여 1등 공신되기를 원치 않으므로 2등 공신에 책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잘못 처리한 일이었으니, 1등 공신의 예(例)에 따라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더 줄 것이며, 그 첩의 자식을 이미 벼슬길에 오르도록 윤허하였으나 그 첩에게는 아직까지 직첩(職牒)을 주지 않았으니 오늘 직첩을 만들어 주도록 하라. 또 대사헌이 말한 내관(內官)과 중들이 폐해(弊害)를 일으킨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내전(內殿)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모두 죄를 주었고, 전주 귀신사와 성주(星州) 적산사(積山寺) 중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내수사(內需司)에서 이미 그 범법(犯法) 사실을 듣고 추고(推考)하고 있다."
이미 정난정의 자녀들로 하여금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문정왕후는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을 을사사화 1등 공신으로 올리고 정난정을 정실로 올렸는데, 당시 윤원형이 의정부 좌찬성 겸 우의정에 있었으므로 남편의 신분을 따라가 자연스럽게 종1품 정경부인의 직첩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정난정의 자녀들이 양반의 자녀들과 통혼까지 할 수 있게끔 전교를 내린 것이었다. 당시 조정 대신들은 정난정 자녀들과의 혼사를 다툴 정도였다. 그녀는 윤원형과의 슬하에 4남 2녀를 낳았다. 정경부인이 된 후로부터는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무상출입하였다.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은 궁궐을 자주 출입하면서 어의들을 호령하며 문정왕후에게 들일 약의 제조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상권을 장악하여 부와 권력을 축적하였다.
문정왕후 수렴청정시절 정난정의 추천으로 그녀의 4촌인 정준이 명종 7년 6월 18일 사헌주 집의라는 직책에 임명되는데, 실록에 의하면 정준은 음험하고 경박한 성품으로 윤원형의 위엄을 빌어 대관이 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인물들을 공격하였고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준의 이렇게 권력을 휘두른 것은 정난정의 입김이 큰 탓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문정왕후의 불심을 받들여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썼으며, 윤원형이 서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서얼차별법 금지를 내렸을 때도 크게 내조를 하였다.
※ 참고자료 : 명종시절 윤원형이 시행한 서출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서얼허통법 시행 제도 자료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10007_001
조선왕조실록
○庚辰/領議政沈連源、左議政尙震、右議政尹漑、左贊成尹元衡議: "謹按《禮典》諸科條: ‘庶孽子孫, 勿許赴文ㆍ武科、生員ㆍ進士試。’ 如以爲庶孽, 多是倡女及婢子所出, 不可齒諸士類, 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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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렬인명대비가 서얼허통법을 윤허하자 전국의 서출들이 윤원형의 저택에 모여들여 환호를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으며, 사대부들은 서얼허통법에 대한 반감이 극해져 서서히 성렬인명대비와 윤원형을 비판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교를 배척한 상황에 서얼허통법까지 시행하니 대다수 사대부들이 반감을 가질만했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선정한 장소가 한강 두모포였는데, 매 해마다 2~3차례 식 물고기에게 쌀밥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문정왕후는 그녀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해마다 이어지고 있는 흉년인데도 불구하고 지방 수령들을 종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여 백성들로부터 크게 원성을 샀으며, 백성들은 "까마귀에게 송장을 빼앗아 개미에게 준다는 옛말보다 더 심하다”며 수군거리곤 했다. 그러던 중 문정왕후의 병세 때문에 붕어를 잡기 위해 쳐놓은 그물에 난생처음 보는 괴이한 물고기가 걸려들었으니 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유생은 “저 큰 물고기가 스스로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대감의 먹이를 탐내다가 멀리 와서 어부에게 잡히니 불쌍하다”며 전횡을 일삼던 외척 세력을 빈정댔다. 또 어떤 이는 이상한 물고기가 잡힌 사실을 윤원형의 이름자에 빗대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즉, 윤원형의 ‘형(衡)’자는 ‘행(行)’자와 ‘어(魚)’자가 합쳐져서 ‘고기가 간다’라는 뜻인데, 그 고기가 멀리 바다에서 강에까지 와 죽었으므로 이는 곧 윤원형이 죽을 징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모포에서 이상한 물고기가 잡힌 지 3일 후 문정왕후가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정왕후가 죽은 지 5개월 후인 1565년 9월 8일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이 윤원형의 본처인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그렇지만 독살한 시기도 그렇고 포도청이 아닌 의금부로 고발하였다는 것도 의문 투성이다. 의금부는 역모 같은 큰 사건을 다루는 곳이는 하지만 포도청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큰 사건의 경우 의금부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포도청을 건너띄고 곧바로 의금부로 소장을 넣어 고발할 경우 받지도 않을 뿐더러 포도청으로 이관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금부로 고발하였는데 받아주었다는 것은 이 사건의 전말에 윤원형을 질타하는 사대부들이 계모 강씨를 충동질하여 포도청이 아닌 의금부로 소장을 넣으라고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의금부로 접수된 사건은 소홀하게 넘길 수 없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라 더더욱 사건을 키우려고 사대부들이 사건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당시 의금부 관직에 있는 사람들 역시 윤원형을 싫어하는 사대부들이 대부분이라 의금부로 접수된 강씨의 소장은 탄핵의 씨앗이 되었다.
어찌 되었던 당시 윤원형과 정난정의 정책을 질책하던 사대부들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독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금부에 접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구실을 삼아 수많은 탄핵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또한 이를 근거로 1565년 8월 3~4일 대사헌 이탁, 대시간 박순 등이 윤원형의 죄악을 26개의 죄목으로 적시하여 처벌을 욕하는 상소를 올렸고 연이어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윤원형과 사이가 안 좋았던 명종도 중립을 지키면서 내심 그들을 지지하며 외숙인 윤원형과 정난정을 감싸지도 않았다.
의금부로 끌려간 전처 김씨 소속의 노비들은 끝까지 정난정을 보호하다가 죽었는데 난정이 평소 여종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또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는 노비들의 행동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강자인 사대부들에게는 맞서 싸웠지만 약자인 노비들에게는 한없이 덕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난정의 노비들이 심한 고문에도 아무 말이 없자 10월 15일 좌부승지 홍인경이 직접 정난정을 추국하고 윤원형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는데 명종은 윤원형과 정난정을 싫어했기는 했지만 차마 외숙과 외숙모에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여 상소를 물리쳤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상소로 지친 명종은 1565년 10월 21일 황해도 강음으로 방귀전리를 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방귀전리란 '풀어 고향에 돌아가게 한다' 하는 뜻으로 유배보다는 가벼운 형벌로 단순하게 벼슬만 삭탈하고 고향으로 보낸다라는 뜻이다.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집요하게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사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숙부부을 사사한다는 것이 도의적으로 봤을 때 부담이 되어 계속 그들의 목숨만을 유지시켰다.
이러한 조정사정을 알고 있었던 정난정은 언젠가는 자신도 의금부로 끌려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항상 품 안에 독약을 가지고 다녔고, 측근들에게 자신을 잡으러 오면 바로 알려달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죽음에 대비했다.
그러나 1565년 11월 13일 독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금부도사가 평안도 진장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에서 말을 바꿔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노비가 이를 보고 달려와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라고 정난정에게 고하자 금부도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것으로 오인하여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차라리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 결국 스스로 자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당시 정난정에 죽음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난정이 죽은 뒤 윤원형은 그녀를 장사 지낸 후에 5일 후인 11월 18일 정난정의 뒤를 따랐다, 이들의 죽음을 알게 된 사대부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난정의 자녀들만큼은 그대로 양반의 신분으로 남겨뒀다. 조선시대 법으로 죄인의 자식은 연좌되는 것이 원칙인데 명종이 윤원형 부부를 죄인으로 명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자식들만큼은 양반으로 계속 살게 되었다.
둘째 오빠인 담(淡)은 사대부들과 앙숙이 된 정난정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녀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과 일체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녀가 찾아올까 봐 집 입구의 담을 꼬불꼬불하게 쌓아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정난정은 늘 가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정난정은 그의 집에 가볼 수가 없었고, 덕분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한 뒤에도 가족들 중에 혼자만 화를 입지 않았다. 둘째 오빠인 담을 제외한 정난정의 가족들은 화를 입기는 하였으나 양반의 신분만큼은 유지할 수 있어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죄인이라는 기록으로 살다 1907년 11월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었고, 4월에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하였다.
※ 참고자료 - 두모포에 잡힌 거대한 물고기의 정체
윤원형 일파의 몰락을 예고했던 이상한 물고기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고래였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종 이었을까?
고래는 피가 따뜻하고 폐로 호흡하며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수중 포유동물이다. 분류학적으로 포유동물강 고래목에 속하는데, 몸길이 약 4m 이상의 것들은 고래류, 그 이하 체장의 것들에는 돌고래류라는 이름이 붙는다.
지구 최대의 동물이란 이미지 때문에 서양에서는 고래를 ‘바다의 괴물’이란 뜻으로 ‘케토스(ketos)’라 불렀고, 우리 조상들은 ‘큰 고기(大魚)’라는 뜻에서 경어(鯨魚) 혹은 경(鯨)이라 불렀다. 이는 한자식 이름인데 우리말인 고래가 처음으로 쓰인 것은 19세기 초 실학자 서유구가 지은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이후부터였다. 때문에 세종 때 간행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운부군옥’을 보면 “해돈은 머리 위에 구멍이 있어 그 구멍으로 물을 뿜어 올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해돈(海豚)은 고래를 일컫는데, 살이 많고 맛이 좋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고래를 바다에 사는 돼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두모포에서 잡힌 고래를 떠올리며 어류 사전을 뒤지던 필자의 눈에 띈 것은 흰돌고래였다. 흰돌고래는 기록된 것과 같이 몸 전체가 흰색이며, 최대 몸길이 4.5m, 몸무게 1.5t 정도 된다. 목을 90° 가까이 좌우로 구부릴 수 있을 만큼 유연한 긴 주둥이와 등면 중앙에 피부가 약간 솟아 있는 특징이 있다. 몸 색깔 및 크기를 비롯해 눈과 코가 물고기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흰돌고래와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흰돌고래는 주로 북극해와 베링해, 그린란드 주변의 연해 지역에서 주로 서식하며, 때로 북해로 흘러드는 강에서도 발견된다. 중국 장강도 흰돌고래의 서식처로 유명한데, 1980년대 초만 해도 장강에 400마리의 흰돌고래가 서식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무리생활을 하는 흰돌고래가 자신의 서식 지역에서 멀리 벗어난 서해까지 와서 혼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고래 전문가인 김장근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장에게 ‘명종실록’의 기록을 들려준 결과, 그는 조심스럽게 ‘상괭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이빨고래아목 쇠돌고래과에 속하는 상괭이는 쇠물돼지 혹은 무라치라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고래 중 한 종이다. 또한 몸색깔이 회백색이며 바다와 민물에서 모두 목격이 가능한데, 특히 서해안에 많이 분포한다. 그러나 상괭이는 돌고래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작아 몸길이가 1.5~2.1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정확하지 않았던 포백척 기준에다 과장이 심할 수 있었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상괭이 중에서도 좀 큰 개체를 놓고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수 있다. 또 회백색의 상괭이 중 유난히 흰색에 가까운 녀석이 두모포 어부의 그물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안에 분포하는 상괭이는 새우 등의 먹이를 따라 강 하류에 자주 출현하는 동물이다. 만약 두모포의 괴이한 물고기가 상괭이였다면 한강에서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한 늙은 어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면 과연 명종 때 한강 두모포에서 잡힌 그 이상한 물고기는 어떤 종의 고래였을까. 혹시 정말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던 간신 무리배의 종말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희귀종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참고로, 제 블로그에 드라마 여인천하와 중중시대 관련된 게시물 몇 개를 더 올렸으니 참고차 읽어주세요.
2001년 SBS 사극 '여인천하' 에서 왜곡된 내용들
https://patrica.tistory.com/253
드라마 여인천하의 실존인물인 기생 옥매향과 아들 '윤흥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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