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주초위왕 사건의 주모자 희빈 홍씨

patrica1977 2024. 1. 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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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조선왕조실록]

 

희빈 홍씨는 중종의 후궁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박원종을 도와 반정 1등 공신에 책봉된 남양군 홍경주의 둘째 딸이며 세조시대에 정승을 지냈던 정인지의 외가 쪽 증손녀이다. 홍경주는 정인지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SBS TV 여인천하와 시중의 대부분에 나와있는 소설에는 희빈이 홍경주의 소실의 딸로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 홍경주는 정실인 권씨부인에게서 1남 2녀를 두었고, 첩실에게는 1남을 두었다. 정실 아들은 충훈도사를 지낸 홍우룡(신숙주의 손녀사위)이고, 첩실에게서 낳은 자식은 홍우귀이다.

 

홍우룡은 부인 신씨가 소생 없이 죽자 다시 권씨 부인(권람의 증손녀)을 부인으로 맞아 3남 2녀를 두었고 희빈 홍씨의 언니는 김명윤에게 출가하여 3남 4녀를 두었다.

 

희빈 홍씨는 1494(성종 25년)년  4월 14일에 태어났다. 13살이 되던 해인 1506년 (중종반정 1년)에 아버지 홍경주의 정치적인 계산에 힘입어 후궁으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곧바로 종2품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 이는 그 당시 아버지인 홍경주의 입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홍씨는  숙의 뒤에 정2품 소의를 거쳐 종1품 귀인이 되었고 봉성군을 낳은 해인 1529년에는 정1품 빈의 첩지를 받게 된다.

 

금원군(1513년생)과 봉성군(1529년생)의 나이차로 보듯이, 희빈 홍씨는 중종과의 슬하에 모두 5명의 왕자를 얻었지만 3명은 모두 단명하였고 둘째인 금원군과 다섯째인 봉성군만 성장하였다. 희빈은 중종의 부인중에서 문정왕후(5명=1남 4녀)와 같이 중종의 부인중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아주었을 정도로 중종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경빈 박씨가 빼어난 외모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면 희빈 홍씨는 후덕하고 푸근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중종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인 홍경주의 후광에 힘입어 대궐을 나갈때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희빈 홍씨는 홍경주의 바람대로 후궁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의 첩자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고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중종의 모든 사소한 일까지 고했다고 하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대단한 것 같다.

 

특히 조광조가 조정에 새로운 사림의 세력으로 떠오르자 그에 위협을 받는 공신세력들은 주초위왕사건을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하는데, 홍경주의 사주를 받은 희빈은 대궐 나뭇잎에 주초위왕을 새겨 넣어 조광조를 제거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한다.

 

중종과 자순대비의 총애를 받으면서 속으로는 아버지의 눈과 귀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는데, 1527년 세자를 저주한 동궁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 후궁들을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자순대왕대비가 힘써 변석하여 말하기를 "홍씨는 충실하고 순한 사람이나, 내 반드시 혐의가 없음을 보증하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홍경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조용하게 지냈지만, 52세가 되던 해인 1545년(명종 1년) 9월 15일에 인종이 승하하고 윤여해(윤임의 백부)와 유희령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대간들로부터 심한 탄핵을 받았지만 문정왕후는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임을 감안하여 용서해 주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3년상이 지난 후 출가하려던 중종의 모든 후궁들을 계속 궐에 남아 살게 하는 없었던 전례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6일 뒤인 9월 21일 어머니 권씨의 병환을 핑계로 중종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대궐을 떠나는데 실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편안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녀가 궐에서 나간 뒤 금원군 사저에서 지내는데, 금원군은 종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40세에는 문소, 연은전, 양전 도감제조를 겸했고 41세에는 사옹원 도제조를 겸했고 43세에는 종부시 도제조를, 45세 때에는 종친부까지도 아울러 관장하였으며, 47세에는 문정왕후의 언문교지를 위조한 승려 성청의 일에 연루된 것으로 모함받아 심한 탄핵을 받았지만 문정왕후와 명종의 옹호로 계속 관직에 머물렀다고 한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보호아래 금원군과 희빈 홍씨 모두 천수를 누렸지만 금원군은 3년 뒤인 1562년, 50세에 세상을 떠난다. 금원군은 슬하에 1녀를 남겼는데 1녀는 남관 의령인 이견복에게 출가하였다. 그렇지만 금원군은 아들을 남기지 않아 결국 덕흥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하릉군을 계후자로 삼았다. 하릉군은 선조대왕의 친형이자 둘째 형이다.

 

희빈은 두 아들이 모두 죽은 뒤에 홀로 지내다 결국 1581년 11월 6일에 88세의 나이로 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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