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
1. 신덕왕후 강씨
고려시대 법으로 따지자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갔지만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가 조선개국 동시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코스로 보면 후궁출신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법으로 따지자면 조선시대에는 부인은 1명밖에 없으므로 둘째 부인 출신 왕비라는 표현보다는 후궁 출신 왕비로 해석하여 올립니다.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참고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사후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후궁으로 강등되어 무려 300년동안 후궁의 신분으로 있다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되고 신주를 종묘로 들여왔으며, 태종에 의해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되었다. 또한 음력 8월 20일에는 존호를 순원현경신덕(順元顯敬神德)으로 추존하였고, 1899년(광무 3년) 양력 12월 19일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최종적으로 추존되었다
2. 현덕왕후 권씨
문종의 정비이기는 하지만 문종이 세자시절 승휘의 첩지를 받고 문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가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여색이 없던 문종의 애정에 갈망한 나머지 결국 궁녀들과 동성애를 하게 되었고, 결국 사실이 발각되자 폐서인이 되었고 사가로 돌아와서 자결하였다. 그 뒤로 후궁이었던 승휘 권씨는 바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4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지만 후궁을 거쳐 왕후가 되었다.
3. 안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로, 예종이 세자 시절 장순왕후가 요절한 뒤에 소훈의 첩지를 받아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제안대군을 낳았고 해양대군이 즉위하자 바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명의의 존호를 받아 명의대비가 되었다.
4. 폐비 윤씨
간택후궁으로 뽑혀 정2품 숙의의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가 된 인물.
그녀의 나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199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서삼릉의 태실을 발굴, 정비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태실에서 발견된 태지에 폐비윤씨가 1455년 윤 6월 1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을 확인하였다.하였다 현재는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 폐비윤씨의 태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간택후궁의 평균나이로 보았을 때에도 탄생연도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논란은 종결된 듯싶다.(참고로 성종은 1457년이므로 폐비윤씨가 2살 연상이 맞음) 다른 간택후궁들에 비해 숙의의 높은 첩지를 받았던 이유는 당시의 권신이었던 신숙주가 그녀의 외당숙이었던 영향이 작용된 듯싶다. 19살인 1473년 3월에 후궁이 되었고 3년 후인 1476년 8월 9일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3개월 후인 11월 7일에 연산군을 낳았다. 그렇지만 3년 후인 1479년 6월 2일(탄신일 다음날) 폐비가 되었고, 1482년 8월 16일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아들인 연산군은 1504년(재위 10년) 3월 24일에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여 제헌왕후로 올렸지만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폐비로 복원되었다. 성종과의 슬하에 2남을 남겼으며 둘째는 단명하였다.
5.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계비로 역시 간택후궁으로 12살의 어린 나이로 들어와 가문을 배경으로 숙의의 높은 첩지를 받았다.
폐비 윤씨가 폐출되자 왕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녀가 왕비가 된 사유는그당시 실세였던 자성대왕대비 윤씨와 가까운 친척인 사유도 있었고, 폐비 윤씨가 폐출되었을 당시에 성종의 자녀는 연산군 외에 단 2녀(순숙공주,신숙공주)밖에 없었는데 모두 정현왕후의 소생이었다. 그당시 성종의 자녀를 낳아준 후궁이 정현왕후 밖에는 없었고 육촌인 윤필상의 실세를 등에 업어 인수대비 한씨의 지지를 얻었던 소용 정씨를 제치고 쉽게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뒤에 자순의 존호를 받아 자순왕대비가 되었고 다시 대왕대비가 된다. 작서의 변 사건때에는 경빈 박씨에게 요사기가 있으니 죄인이라고 단죄하라고 명하였고 희빈 홍씨에는 어질고 참한 사람이니 혐의가 없음을 보증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후궁들을 엄히 다스리면서도 따뜻하게 보실피는 내명부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6. 장경왕후 윤씨
중종의 간택후궁으로 숙의의 첩지를 받고 들어왔다가 당시 실세이자 외숙부였던 박원종의 영향으로 쉽게 국모의 자리에 올랐지만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로 졸한다
7. 공빈 김씨 (공성왕후 김씨)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친모인 공빈 김씨가 잠시 왕후로 추촌 되었을 때의 시호이다. 광해군은 자신의 서출의 신분으로 임금에 오르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였던 공빈 김씨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전(殿)의 이름은 봉자(奉慈)라고 하였고, 능의 이름은 성릉(成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공빈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하였고 다시 후궁으로 강등시켰다. 지금은 후궁으로 강등되었지만 한때마다 잠시 왕후로 올렸던 전례가 있었다.
8. 옥산부대빈 장씨
자의대비전 침방 나인으로 입궁하여 자의대비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숙종과 만나게 되었고 장씨에게 반한 숙종은 그녀에게 승은을 내리지만, 먼 친척인 통역관 장형이 남인에게 자금을 대고 그녀의 모친이 남인 조사석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서인 세력이었던 명성왕후가 알게 되자 후궁을 첩지 받기도 전에 명성왕후에 의해 당쟁에 휘말려 사가로 쫓겨난다. 그렇지만 단경왕후, 명성왕후가 차례로 죽고 인현왕후의 간청과 자의대비의 명으로 6년 만에 재입궁한 뒤에 비로소 정4품 숙원의 첩지를 받는다. 그 이후에 남인의 실세를 배경으로 소의, 빈을 거쳐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5년 후에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바뀌는 갑술옥사로 인하여 폐출되었고, 1701년 10월 10일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기록상 희빈 장씨의 죽음 묘사가 달라서 사사되었는지, 자진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분분하다. 노론의 입장에서 집필된 수문록과 인현왕후전에는 장희빈이 숙종에 의해 강제로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정사 기록인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그녀가 죽기 3일 전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후궁이 중전이 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조선 왕실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외모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는데 "자믓 아름다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유일하게 외모에 대한 언급이 있던 여인인 것을 봐서는 대단한 미인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서는 궁녀에서 왕비가 되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다. 1722년, 그녀의 아들인 경종은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즉시 왕후로 추존할 수 없었다. 옥산 부대빈에 대한 예우는 선조의 생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경종은 생모인 장씨를 왕후로 복위시키려고 하였지만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9. 순헌황귀비 엄씨
조선왕국이 아닌 조선제국의 1대 황제인 고종황제의 후궁이다. 장희빈, 숙빈 최씨 못지않게 신데렐라 같은 인생역전을 이룬 인물로, 비록 후궁이기는 하지만 명성황후가 죽은 후로는 실질적인 국모로서의 대접을 받았다(왕비가 된 적은 없지만 실질적인 국모의 대접을 받아서 참고로 올립니다.)
평민의 딸로 1854년에 태어나 8살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경복궁에서 배찰되어 있다 나중에 상궁이 되자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다. 그렇게 명성황후 밑에 있다 고종의 눈에 띄어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승은을 입었지만 얼마 안 되어 명성황후에게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윤용선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청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는데 엄씨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추후 순종의 계비 간택 당시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
명성황후가 죽고 을미사변 후에 고종의 부름을 받아 재입궁하게 되었고 다시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늦은 나이인 45살(1897년)에 비로소 영친왕을 낳았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 되었다. 그리고 1911년에는 황귀비가 되었다. 명성황후 사후 고종은 엄씨를 황후로 간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준용을 비롯한 종친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엄씨는 귀비까지 오른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1905년에는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에는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와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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