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문정왕후가 정말 악녀일까요?

patrica1977 2024. 2.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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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조선왕조실록]

 

흔히 말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죠. 문정왕후와 같이 한 사람을 더 언급하자면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입니다.
두 사람은 역대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인종과 문정왕후의 관계도 안 좋게 보는 야사가 많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녀가 정말 악녀인지 한번 기록을 찾아보겠습니다.

 

(1) 중종이 승하하고 3년상이 끝나자, 창빈 안씨가 궁궐을 떠나려고 했을 때 그녀를 궁에 살게 합니다. 사극 여인천하에 보면 창빈 안씨가 문정왕후 편에 서서 잘 보인 덕에 궁궐에 계속 산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종의 후궁 중에서 선원계보에 없는 "귀인 한씨"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요.

 

귀인 한씨(1500~1574)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손녀로 아버지는 서원군 한순입니다. 참고로 한백륜의 딸은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이고 귀인 한씨는 안순왕후의 조카가 되는 셈입니다. 19살에 궁궐에 들어와 후궁이 되었고, 21살에는 정8품 전찬이 되었고, 29살인 1528년에 왕자를 낳았지만 왕자는 돌이 되기 전에 요절합니다. 30세인 1529년에 정5품 상궁이 되었고, 33세인 1532년에 종4품 숙원으로 오르고, 41세인 1540년에는 종3품 숙용이 되었습니다. 45세인 중종 39년(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자 3년 복을 마치고 인수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가 만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이죠. 명종대에도 문정왕후의 보호아래 명종 6년에는 종2품 숙의가 되고, 72세인 선조 4년에는 정2품인 소의가 되고, 73세에 돼서야 종1품 귀인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2) 희빈 홍씨도 문정왕후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희빈 홍씨는 아들인 봉성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궁궐을 떠났는데 여인천하에서는 평상시 문정왕후의 눈에 안 들어와서 내쫓긴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고 희빈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희빈에 대한 감정을 잘 나타내준 기록이 여러 있는데요. 원래 종친은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고 벼슬을 얻을 수도 없지만 그녀의 장남인 금원군은 23살에 문소전에서 도제조를 겸하게 되었는데 이를 체직 할 것을 아뢰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중종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40세인 명종 7년에 문조, 연은전 양전 도감제조를 겸했고, 41세인 명종 8년에는 사옹전 도제조를 겸했습니다. 45세인 명종 12년에는 종친부까지도 관장했으며, 47세 때인 1559년 11월 9일, 대간으로부터 성렬인명대왕대비(문정왕후)의 언문교지를 위조한 승려 성청의 일에 연루되어 대신들로부터 심한 탄핵을 받았지만 문정왕후와 명종의 옹호로 계속 관직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문정왕후의 보호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입니다.

 



(3) 중종의 후궁 숙원 홍씨도 중종대왕 사후까지 종4품 숙원이었다가 후일 종2품 숙의로 오른 것도 문정왕후의 옹호로 계속 궁궐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아들인 해안군 이희가 사옹원 도제도로 있을 때 근만으로 인하여 대신들로부터 채찍을 받았지만 명종과 문정왕후의 보호로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4) 중종의 후궁 숙원 이씨의 아들인 덕양군의 노비가 명종 2년 7월 13일에 덕양군을 농락한 혐의로 사헌부의 건의로 의금부에 추국토록 하였는데 3일 뒤인 7월 16일, 문정왕후가 노비를 사면하도록 전교하였습니다. 전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덕양군 이기는 금년 봄부터 첩의 문제 때문에 부인과 서로 다투었다 하므로, 상께서 일찍이 주의를 시켰었다, 다물사리는 비록 보모라고는 하나 말할 수 없이 용렬하다. 그래서 소문이 잘못 전해져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번에 각자의 공사를 보건대 아마도 사실이 아닌 것 같으니, 어찌 애매한 줄을 알면서 죄를 줄 수가 있겠는가"

 

중종의 후궁중에서는 중종보다 일찍 죽은 후궁들이 여러 명이 있기 때문에 중종 3년상 후에 생존했던 후궁들은 모두 궁궐에 남아 살게 해 준 것으로 보이며, 그 후궁들의 자녀들, 종친들에게도 각별히 배려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대 왕후들은 후궁이 궁궐을 떠나면 국법이기 때문에 그대로 놔뒀지만 문정왕후는 중종을 같이 섬기던 후궁들에게 각별히 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다.

 

(5) 명종 8년 10월 좌찬성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증거자료 - 조선왕조실록 사이버 복원 센터 ]

 

(명종 8년 10월 7일 경진)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10007_001

 

조선왕조실록

○庚辰/領議政沈連源、左議政尙震、右議政尹漑、左贊成尹元衡議: "謹按《禮典》諸科條: ‘庶孽子孫, 勿許赴文ㆍ武科、生員ㆍ進士試。’ 如以爲庶孽, 多是倡女及婢子所出, 不可齒諸士類, 則

sillok.history.go.kr

 

서얼(서출)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하여 결국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서얼허통법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이념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의 지지를 받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얼허통법이 통과되자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윤원형의 저택으로 몰려들었으며, 이를 명종실록에서는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는 서얼허통법이 윤원형의 첩실이었던 정난정을 적실로 올려줄려고 만든 허울뿔인 제도라고 말하는데 서출이었던 첩 하나 때문에 이런 법 자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굳이 적실로 올리려면 굳이 이런 법을 만들지 않고 그냥 올리면 되는 일인데 굳이 이런 법을 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서얼허통법이 시행되기 전인 7개월 전에 정난정은 이미 정실부인이 된 상태였습니다. 증거자료를 올립니다.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3월 14일 경인 2번째 기사]

 

정원에 전교하니  "지난 을사년에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조정(朝廷)이 이반(離叛)하였으나, 하늘에 계신 조종의 도움으로 종사가 다시 안정되었다. 그때 윤원형(尹元衡)의 막대한 공은 1등 공신에 책록(冊錄)할 만하였으나 본인 스스로 사양하여 1등 공신되기를 원치 않으므로 2등 공신에 책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잘못 처리한 일이었으니, 1등 공신의 예(例)에 따라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더 줄 것이며, 그 첩의 자식을 이미 벼슬길에 오르도록 윤허하였으나 그 첩에게는 아직까지 직첩(職牒)을 주지 않았으니 오늘 직첩을 만들어 주도록 하라. 또 대사헌이 말한 내관(內官)과 중들이 폐해(弊害)를 일으킨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내전(內殿)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모두 죄를 주었고, 전주 귀신사와 성주(星州) 적산사(積山寺) 중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내수사(內需司)에서 이미 그 범법(犯法) 사실을 듣고 추고(推考)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서얼허통법이 시행하기 이전인 7개월 전에 정난정에게 이미 정실로 올렸다는 걸 알수 있으며, 오히려 서얼허통법이 시행된 이유는 정난정이 정실로 올려진 후 서출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정난정이 윤원형을 설득하여 시행된 제도입니다.

 

(6) 중종이 죽고 1544년 11월 15일 성렬인명대왕대비(문정왕후)가 선왕의 빈전을 자신이 거처하는 창경궁 통명전에 모시고 싶다고 하여 결국 통명전에  설치되었는데, 통명전은 협착한 데다 대신들이 많이 들락거리지 못하여 대신들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인종이 빈전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었던지라 결국 병약했던 인종이 악화되어 승하한 큰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자신이 죽기 전에도 중종과 합장히여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선왕인 중종에 대한 각별한 감정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에 중종과 같이 묻혔지만. 명종이 문정왕후의 능에서 물이 센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문정왕후의 능을 현재의 태릉으로 옮깁니다.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은 역대 제왕과 왕비의 능과는 달리 지명으로 쓰일 정도로 상당이 유명하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를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녀의 기가 사후에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았나 싶을 정도라고 합니다. 태릉을 둘러보면 역대 왕비의 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문정왕후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7)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불교를 국교를 바꾸고자 시도했던 인물이 문정왕후입니다. 문정왕후는 먼저 보우를 등용하여 지금까지 배불정책에 의해 사라진 선교 양종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철폐된 승과를 부활시켰는데 이때가 명종 5년 (1550) 12월이었습니다. 이어 명종 6년(1551) 에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삼고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 겸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선시를 교종의 본사로 삼고 수진을 판교종사도대사 겸 봉선사 주지로 임명합니다.  이런 일련의 정책에 이어 부활된 승과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종 6년 (1551) 11월 도승을 위한 송경시험을 치르고 명종 7년 양종의 승선고시인 승과가 실시되었는데, 부활된 승과에서 선종 합격자 21명,  교종 합격자 12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 중흥책의 결과 교단이 활기를 띠게 되고 유능한 인물이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선불교 중흥의 큰 인물인 서산대사 유정도 이때의 승과를 통해 배출되었고, 뒤에 손교양종판사를 역임하였고 사명당 유정도 그 후의 승과에 등용되었습니다. 이 당시 부활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들은 뒤에 일어나는 임진왜란의 극복에 많은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지만 서얼헐통법 시행과 불교를 부활한 점은 많은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악평을 받는 것은 그녀가 도입한 제도들이 당시 사대부(양반)들에게 반발을 유발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KBS2 TV 역사스페셜 문정왕후 편을 보면 문정왕후는 불교에 쓰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총 400여 점의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내외명부를 잘다스리고 선왕인 중종의 후궁들과 종친들을 보호하였으며 불교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 모두 실록에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록과 각종 정사에 이렇게 기록을 해놓고 악녀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명성황후와 비교가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권력을 행사한 부분에 있어서는 두 여인은 비슷한 과실을 남겼지만, 내명부를 관리하는 것은 문정왕후가 더 앞선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명성황후는 고종의 후궁들을 쫓아내기에 바빴거든요. 영보당 이 씨, 귀인 장씨, 순원황귀비 엄씨 모두 명성황후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순원황귀비는 운이 좋게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죽자 고종의 부름으로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됩니다.

두 여인 모두 권력을 행사한 과오가 있지만 내명부를 잘 다스린 문정왕후는 악녀로 평가되고 있고 후궁들 쫓아내기에 바빴던 명성황후가 문정왕후에 비해 좀 더 긍정적으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일반인들에게 악녀라는 인식이 없으니 뭐가 좀 아리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름지기 국모의 기본 소임은 내외명부를 잘 다스리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정왕후가 더 악평을 받는 다는 건 사대부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제 블로그에 문정왕후와 관련된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같이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문정왕후는 왜 악녀이고 명성황후는 왜 위인으로 평가받을까? (tistory.com)

 

문정왕후는 왜 악녀이고 명성황후는 왜 위인으로 평가받을까?

[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문정왕후는 1565년 사망 후 죽은 지 4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악녀라는 평을 벗지 못하고 있고, 명성황후는 우리나라 위인전에 보면 꼭 들어있는 인물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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