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숙빈 최씨는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patrica1977 2024. 1. 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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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

 

원래 왕비의 자리가 비어 다음 왕비 자리를 정할 때에는 세 가지 전례대로 왕비를 책봉하였다.

 

첫 번째로, 전국에 간택령을 내어 처녀 간택을 통하여 왕비를 책봉하였다. 여러 간택 절차를 걸쳐 최종 3 간택까지 이르고 이 3명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3 간택에서 떨어진 두 명의 처녀는 왕실의 결정 하에 후궁으로 남겨 둘 수도 있었다, 단종대왕의 예가 있는데, 3 간택에서 붙은 정순왕후 송 씨가 왕비가 되고 나머지 두 명의 처녀들은 단종의 후궁이 되었던 전례가 있다.

 

두 번째로, 후궁 중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궁에서 왕비가 된 대표적인 여인은 바로 폐비 윤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배경으로 들어온 여인인데, 대표적인 왕비는 문정왕후이다. 형식상으로는 삼간택의 절차로 들어온 경우이지만 삼간택을 하려면 일단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는 절차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문정왕후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원자(인종)를 보호하기 위해 원자의 외숙인 윤임이 자신과 같은 인척인 파평 윤씨의 여인을 찾던 중에 문정왕후를 간택한 경우이다. 그 당시 자순대비 윤씨도 역시 파평윤씨였기 때문에 문정왕후는 쉽게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전례 하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도 인현왕후 민씨가 1689년에 폐위가 된 덕분으로 숙종에 의해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1694년에 중전 장씨가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1701년에는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민씨가 죽자 누가 보더라도 다시 왕비가 될 사람은 세자 균의 생모인 희빈 장씨였다.

 

솔직히 희빈 장씨가 후궁으로 강등된 이유는 숙종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희생량(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바뀜)이었지, 폐비 윤씨처럼 그녀의 허물이 크게 있었던 것은 없었다.

 

실제로 희빈 장씨는 조선시대 여인이 지키야 할 칠거지악 중에서 한 가지라도 어긴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칠거지악의 죄악 중의 하나인 아들을 못낳은 죄를 경종이라는 아들을 낳아 조선의 대를 유지시켜 주었다. 그리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있던 5년 동안 내명부에서는 중전 장씨 외에는 대비,대왕대비 심지어는 후궁이 아무도 없어 문제를 일으킬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장렬왕후와 명성왕후는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죽었고, 숙종에게는 공식적으로 희빈을 제외한 5명의 후궁이 더 있었는데 그녀들은 영빈 김씨, 명빈 박씨, 숙빈 최씨, 소의 유씨, 귀인 김씨였다.

 

이 중에서 영빈은 남인 세력에 의해 인현왕후와 같이 폐위되어 사가로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중전이 된 희빈 장씨와 만날 일 자체가 없기 때문에 투기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명빈 박씨는 1698년에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소의 유씨도 1698년에 숙원의 첩지를 받았다. 희빈 장씨는 4년 전인 1694년에 이미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희빈이 중전으로 있을 때 당시에는 역시 이들과 안면이 없어 투기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귀인 김씨 (영빈 김씨와 다른 동명이인 후궁)도 역시 희빈이 죽은 지 4년 뒤인 1705년에 숙종으로부터 숙원의 첩지를 받아 희빈과 아무런 안면이 없었다.

 

그리고 수문록이라는 야사에는 숙빈 최씨가 무수리 시절 숙종에게 은혜를 입은 후로 중전 장씨에 끌려가 심하게 형장을 받고 독에 갇혔다가 우연히 거꾸로 세운 둑을 이상하게 여긴 숙종에 의해 구조되어 무수리 최씨도 살았고 최씨가 임신한 태아도 무사했다고 적혀있는데,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숙빈이 무수리에서 숙원의 첩지를 받은 날자는 1693년 4월 26일이고 1693년 10월 6일에 첫째 아들인 영수를 낳는다. 그리고 영수는 2개월 후인 12월 13일에 사망한다.

[조선왕조 실록 1693년 4월 26일 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04026_002

[조선왕조 실록 1693년 10월 6일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10006_002

[조선왕조 실록 1693년 12월 13일 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12013_001

아무리 첩지를 받지 못했더라도 용종을 잉태한 여인을 추궁하고 문초한다는 것은 국모의 폐출을 거론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 장씨가 이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최씨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수문록은 누가 보더라도 희빈 장씨를 깎아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지은 글이라고 볼 수 밖에는 없으며 희빈 장씨가 왕비로 있던 시절에는 대왕대비, 대비 및 후궁들이 아무도 없던 시기라 마찰을 일으킬 일 자체가 없어 희빈의 내명부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실덕이 있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희빈 장씨가 다시 왕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한 서인과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 고변하였고, 결국 희빈 장씨는 자진하였다.

그리고 다음 왕비에 누구를 책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고민이 필요 없었다. 다시 노론에게 정권이 돌아갔고 국모도 다시 노론사람 중에서 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숙종은 노론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오히려 조정 대신들을 물갈이하여 희빈 장씨를 지지하는 소론으로 채웠고, 왕비도 소론 출신인 인원왕후 김씨를 책봉하였다.

 

당시 숙종의 후궁 중에서 노론을 지지하는 여인이 두 명이 있었는데 바로 숙빈 최씨와 영빈 김씨였다. 그렇다면 두 여인은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숙종이 국법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숙종 이전에는 후궁도 왕비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숙종은 희빈 장씨가 죽기 하루 전인 1701년 10월 7일에 후궁이 왕비에 오를 수 없게 하는 비망기를 내려 국법으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숙빈 최씨와 영빈 김씨는 왕비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숙종이 이런 국법을 내린 이유는 희빈 장씨의 사례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속내는 이미 서인의 영수로 떠오른 연잉군을 앞세운 숙빈 최씨를 경계하여 서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출신에 문제가 있었다.

 

왕비 자리에는 조건이 있었다, 보통 간택령을 내릴 때에도 모든 조선의 여인들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 집안의 여식에게만 해당이 되었다. 그렇지만 숙빈은 아무리 정1품 빈의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출신 자체가 사대부 집안 여식이 아니었기에 누가 봐도 문제가 있었고 설사 숙종도 후궁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국법을 안 만들었다고 해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할 만한 특별한 명분이 없었다.

 

세 번째 이유는, 숙종은 세자 균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희빈 장씨가 죽었을 때 당시에는 숙종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세자 균과 연잉군(훗날의 영조)이었다. 세자 균은 숙종이 30살에 얻은 아들이라 숙종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존재였고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숙빈의 신분을 극복하고 왕비가 되었다면 숙빈의 소생인 연잉군은 연잉대군으로 적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대신들은 훗날의 연산군과 같은 화를 안 당하기 위해 이미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의 소생 세자 균을 폐위하고 연잉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자의 명운도 오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숙종은 이런 부분까지 염려하여 숙빈을 왕비로 세울수 없었다.

 

희빈 장씨가 숙종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근본적인 원인은 숙종이 숙빈으로부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다는 신당을 차렸다는 고변을 받고 죽었을 정도로 숙빈 최씨는 희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숙빈이 왕비가 된다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 균을 친자식처럼 돌봐준다는 국모의 소임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숙종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숙빈은 이미 아들인 연잉군을 낳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잘 키워줘 봤자 친 아들인 연잉군보다 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빈 김씨가 왕비가 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영빈 김씨는 그 당시에는 귀인 김씨로 있던 시절이었고, 그녀는 당당한 명문가 여식에 노론 집안 출신이었고 자식도 없어 왕비로 책봉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빈 김씨는 인현왕후 민씨가 직접 뽑은 후궁이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은 다음 명분 상의 왕비 자리 후보로는 숙빈이 아닌 귀인 김씨가 강력한 왕비 후보였다. 결정적으로 인현왕후가 영빈 김씨를 중전으로 맞아달라는 유언까지 남겨 숙종의 의지에 따라 영빈이 중전에 오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영빈은 왕비가 되기에는 힘이 약했다. 자식이 없어 당색만 소론이었다면 충분히 왕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당시 숙종이 노론을 경계했던 시기인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생 동안 숙종의 총애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새로운 중전 후보로 영빈 김씨가 잠시 거론된 적이 있었지만 이미 숙종의 마음에는 떠나 있었다. 더군다나 숙종이 세운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국법에 의해 왕비 후보에는 완전히 탈락한다.

제일 중요했던 것은 숙빈과 영빈 김씨는 노론세력의 사람들로 소론 세력인 희빈 장씨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 희빈의 아들인 세자 균을 친 아들처럼 보살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숙종은 이미 알고 있기에 세자를 친 아들처럼 보살펴 줄 희빈에게 적대감이 없는 새로운 여인을 왕비로 책봉하여 세자를 잘 보살피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1702년 10월, 숙종은 인원왕후 김씨 책봉식에 맞춰 오랜 세월 동안 귀인의 신분으로 있던 김씨에게 정1품 영빈으로 올려주었지만, 왕비 책봉식에 기존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왕실 전통이었고 그 뒤에도 거의 찾지도 않았다. 영빈은 정1품 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총애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선원계보에는 빠져있다. 숙종 사후에는 출궁 후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고초를 겪었으나 인원왕후의 비호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연잉군 즉위 후에는 영조의 보호하에 편안하게 살다 67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영조는 영빈과 각별한 사이였고 숙빈이 죽은 후에는 친모처럼 따랐다고 밝혔다. 영빈이 사망하자 사당을 봉궁 후 대신들에게 체제 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행각과 동시에 수시로 영빈의 사당에 들러 명복을 비는 친모 못지않은 정성을 보였다.

네 번째 이유는, 숙종의 총애가 식었기 때문이다.

 

여러 역사 자료를 종합해 본다면 숙종은 남편감으로는 믿음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시켜 5년 동안 유폐시켰고, 희빈 장씨 역시 다시 후궁으로 강등 시키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진을 명한다. 그리고 숙빈 최씨 역시 그녀들의 절차를 따르게 된다. 희빈 장씨가 자진한 후 숙종은 전에도 그랬듯이 희빈 장씨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되는데, 그 원인을 희빈이 저주하는 신당을 차린다고 고한 숙빈 탓으로 돌린다. 희빈 장씨 사사 후 숙종은 숙빈을 이현궁으로 출궁 시키는데 이 시기가 1702~1704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1718년에 숙빈이 죽을 때까지 숙종은 숙빈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숙빈은 말년을 숙종에게 버림받고 살다 죽게 된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묘자리를 정하는 과정에서 숙종은 숙빈을 일반인보다도 못한 대우를 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그대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숙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또한 숙빈에게 승은을 내린 것은 한때의 실수라고 언급할 정도로 숙빈이라는 존재는 숙종의 입장에서는 총애가 식은 후에는 눈엣가시, 혹덩어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하는 법을 만든 원인은 겉으로는 희빈 장씨 같은 사례를 방지하고자 하는데 주목적이었다고 하지만, 속내는 숙빈 최씨를 경계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실제로 숙종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인과 남인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질 때 맞춰 환국을 단행하여 대신들의 권력을 꺾고 왕권 강화에 중점을 두었는데 갑술옥사와 기사환국이 대표적이다.

서인들이 기록한 야사에는 인현왕후가 착하고 희빈 장씨가 못되어 복위시켰다고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실제 기록을 보면 숙종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왕권 유지를 위해 서인과 남인을 뒤엎었다 갈았다를 반복하였다. 숙빈 최씨 같은 경우는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받는 여인이었고 당시 서인 세력의 영수로 떠오르는 여인이었다. 또 연잉군까지 낳았으므로 숙빈이 새로운 왕비가 된다면 서인 세력의 권력이 숙빈 중심으로 재편될 거라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희빈 장씨를 사사하면서 아예 숙빈이 새로운 왕비 자리를 오르지 못하게끔 후궁이 왕비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을 한 것이었다.

 

희빈 장씨를 사사한 다음 해 숙종은 한 후궁으로 권력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지 위해 내명부 개편을 하였는데 기존 후궁들의 첩지를 모두 올려주고 숙빈을 이현궁으로 출궁시키고 서인 세력의 다른 후궁인 영빈 김씨도 첩지만 올려주고 거의 찾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의 어린 왕비를 책봉하여 노론의 권력이 재편되지 않도록 견제를 하는데 평생 신경을 썼다.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도 당시 인현왕후를 중점으로 한 서인세력이 커져 환국을 고의적으로 일으켜 정권을 갈아엎은 것이고 중전 장씨를 폐위시키고 환국을 일으킨 이유도 장씨를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숙종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인현왕후, 희빈 장씨, 숙빈 최씨를 쉽게 취하고 쉽게 버리는 행동을 많이 보여줬다.

추후 숙종은 또다시 자신의 권력 유지와 견제를 위해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폐위하고 연잉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이 유명한 정유독대사건이다. 숙종에게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강지처를 버리고 아들까지 버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못되게 만드는 법은 허점이 있었다. 숙빈을 견제하려고 만든 법임에는 틀림없지만 후궁의 소생도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법까지 만들지 않은 것은 숙종의 실수다. 숙종이 그런 법을 알고도 못 만든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경종 외에는 모두 서자였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경종을 진정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후궁의 아들도 임금이 못 되는 법을 같이 만들었어야 경종도 독살설도 없었을 것이고 경종 치세도 오래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서자가 왕이 못 되는 법을 안 만들었다는 의미는 결국 경종이 오랫동안 보위에 있도록 지켜줄 마음이 없었다는 의미이고, 남서인의 세력 상황을 봐서 추후 또다시 환국을 일으킬 때 세자도 갈아엎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숙종은 임금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쓴 임금이지만 아버지로서 지아비로서는 비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조선의 몇 안 되는 군주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숙빈이 왕비가 되느냐 못 되냐의 문제는 영조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도 연관이 깊다. 솔직히 영조는 왕이 되기에는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숙종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3명은 조졸하고 3명만 성장했는데 바로, 경종, 영조 그리고 연령군이었다. 연령군은 명빈 박씨 소생으로 숙종의 막내아들인데 숙종이 연령군을 가장 아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연령군은 20살의 나이에 아깝게 죽는다. 그래서 다음 대를 이을 왕자가 연잉군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잉군은 무수리 어머니를 둔 탓으로 왕이 되기까지 많은 위협과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당시 실세였던 노론 세력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노론 세력과 인원왕후 김씨의 도움을 얻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후궁들이 아들을 한 명도 낳지 못하고 다음에 들어온 인원왕후 역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어부지리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다른 후궁 중에 왕자가 있었으면 영조는 왕이 못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조가 왕이 된 후에 그가 왕이 된 것에 형인 경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항거하여 전국에서 많은 역모가 있었다. 당시 서인은 노론과 서론으로 갈라져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지지했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경종이 죽고 연잉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영조는 재위 초창기에 소론 세력의 반발과 그 외 수많은 역모를 진압하느라 심적으로 고생이 많았다.

또한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천한 소생의 어머니를 두어 평생 신분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고 천한 무수리 아들이라는 대신들의 험담을 들으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자녀 2남 7녀 모두 명문가와 혼사 시켰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 역시 그 당시 막강한 권세가이자 명문가였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정황을 따져보면 왕이나 왕비가 되려면 정치 적으로 연줄도 있어야 하고 권력의 이득과 속성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따라서 숙빈은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왕비가 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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