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2001년에 SBS에서 방영되었던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 탤런트 박주미씨가 배역을 맡았던 옥매향은 실존인물로서 장경왕후의 오빠인 좌찬성을 지낸 윤임의 첩이다. 윤임은 대윤파의 수장이자 많은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 파평 윤씨의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증손녀의 손자이기도 하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윤임(텔런트 이효정)은 한명의 정실부인만 보여주는 점잖은 성격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 그의 성품은 여색을 탐하고 정치욕이 강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윤파인 윤원형과의 대립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인물이다. 그는 두 명의 정실부인과 3명의 첩을 통해 모두 8남 3녀를 두었는데 윤임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두명의 정실부인과 3명의 첩을 통하여 모두 8남 3녀를 두었는데 옥매향은 윤임의 두번째 첩실로 아들인 윤흥제를 낳았다. 첫번째 정실부인인 여흥 이씨가 3남 2녀를 출산한 후에 사망하였고, 두 번째 정실인 현풍 박씨를 들였으며 3남을 두었다.
8명의 아들 중에서 3명의 아들은 을사사화때 아버지 윤임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남은 6명 아들중에서 5째 아들인 윤흥신과 8째 아들인 윤흥제는 임진왜란때 같이 전사하였다.
여인천하에서는 옥매향과 정난정이 절친으로 설정되었지만 실제로 옥매향이 활동하던 시기는 중종시대이고 정난정은 명종에 활동하던 기생으로, 두 사람의 활동시기는 차이가 있어 두 여인의 실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활동했던 시기를 짐작하였을 때에는 옥매향이 정난정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 을사전문록, 국조기사, 조선해어화사에서도 을사사화의 원인을 대윤의 수장인 윤임과 소윤의 실세인 임백령이 옥매향이란 한 여인을 두고 일어난 것으로 묘사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다.
야사인 을사전문록, 국조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백령이 윤임과 한 마을에 있으면서 일찍이 기생 옥매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임백령이 질투하고 미워하여 윤임을 역모로 몰았으니 을사년의 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한 윤임을 죽인 뒤에 그의 처첩을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눠줄 때 옥매향을 임백령의 종으로 삼기를 원했으니 마침내 그의 계책을 이뤘다. 당시 백성들은 이 일로 더욱 그의 간사하고 악독함을 분하게 여겼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긍익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기록정신으로 유명하였는데, 그는 이 같은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유명한 야사인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고 , 그는 《연려실기술》에서 을사사화의 발생 배경을 좀 다르게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519년 임백령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종으로부터 어사주를 받고 백마를 타고 한양성 주변을 유가행렬하는 도중 임백령은 이미 어사주에 취해 잠이 들었다. 임백령을 태운 백마는 남소문 근처 어느 기방에 멈췄고 그 때 옥매향이 그를 맞이해 안으로 모셨는데 그렇게 하룻밤의 관계를 통해 둘은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임백령은 옥매향을 기적에서 빼주고 싶었으나 당시 돈이 없었던 임백령은 그럴 수 없어 기방에 자주 가는 걸로 위안을 달랬다. 얼마 후 당시 세도가였던 윤임이 탁족놀이를 한다고 하여 각종 대신들과 여러 기생들이 참여하였는데 옥매향은 기생으로 참여하였고 임백령도 탁족놀이에 참여하였다. 윤임은 탁족놀이에서 옥매향을 보고 첫 눈에 반했는데 옥매향과 임백령의 묘한 관계를 알아챈 윤임은 먼저 선수쳐서 옥매향을 첩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옥매향과 임백령은 서로를 못 잊은채 그리워하다 26년이 지난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는데, 서인파였던 임백령이 추관이 되어 문초하는 과정에서 윤임과 옥매향을 문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게 된다. 26년만에 옥매향을 다시 만난 임백령은 이미 40살이 넘은 옥매향의 변하지 않은 모습에 눈물을 흘렸고 추관의 자리에서 벗어나 동료인 허자가 대신 문초를 한다. 허자는 문초 후에 옥매향에게 임백령을 아직도 사랑하냐고 물었고 이에 옥매향은 사랑할 나이는 지났지만 아직까지 죽지않고 살아있는 것은 임백령을 보고 죽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아직도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 허자는 옥매향을 가마에 태워 임백령의 집으로 보냈고 그렇게 둘은 다시 재회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회한지 한 달 후에 임백령은 명나라로 떠났으나 낙마로 사망하여 짧은 인연이 이렇게 끝난다."
다른 야사인 조선해어화사에서도 임백령이 질투에 멀어 윤임을 처형하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옥매향과 관련된 내용은 공초 당시 기록 6건만 존재할 뿐 그외에 어떤 기록도 알 수 없고, 위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야사이기 때문에 사실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옥매향이 윤임과 임백령에게 모두 사랑을 받았었고 두 사람이 모두 취한 것은 맞기에 윤임과 임백령 사이에 어떤 감정이 있었는지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옥매향은 어렸을 때부터 당시 평양에서 절색으로 유명하였기에 이런 옥매향을 두고 윤임과 임백령의 서로를 향한 질투와 견제는 충분히 예상하지 않을까 싶다.
사극 여인천하에서는 옥매향이 임백령을 곁을 떠다는 것으로 나오고 소월향이라는 기생이 임백령의 새로운 첩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옥매향 역을 맡았던 박주미씨가 임신하여 더는 촬영할 수 없어 중도하차하게 된다.
옥매향은 문초 당시 "윤임과 유관, 유인숙 대감께서 윤원로 형제를 제거해 대왕대비 마마의 양팔을 꺾어놓은 다음 어리신 주상 전하를 폐위시키고 계림군과 봉성궁 두 분 가운데 한 분으로 왕통을 잇게 하여야 한다고 말했사옵니다" 라고 결정적인 거짓 증언을 하였고, 결국 61명이 처형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된다.
을사사화로 인해 8명의 아들 중에서 3명의 아들(흥인, 흥의, 흥례)은 곤장을 맞는 과정에서 장살되었고, 남은 5명의 아들 중에서 현풍 곽씨의 차남인 윤흥신과 옥매향의 아들인 윤흥제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복형인 윤흥신이 임진왜란때 다대포성 의 첨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같이 다대포성으로 가서 왜구와 맞서 싸웠다.
임진년(선조25년) 4월 13일, 왜군들이 다대포성을 침략하였는데 윤흥신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역사상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그렇지만 4월 14일 일본군은 재정비를 한 뒤에 다시 다대포성을 침략하였고 윤흥신 첨사는 홀로 진을 지키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왜구의 칼에 찔려 순절하였는데 윤흥신 비문에는 윤흥제가 그를 끌어안고 함께 죽었다고 한다. 결국 다대포성은 왜구에게 함락된다. 나중에 윤흥신과 윤흥제 형제를 장사지낼때 윤흥제가 형을 끌어안은 것을 끝내 풀지 못하여 두 형제를 같이 관에 넣어서 합장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윤흥신 첨사의 일은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아 뒤늦게야 송상현과 정발을 배향했던 충렬사에 아울러 배향되었고, 비석은 그보다도 뒤인 1841년(헌종 7년)에 동래 부사 홍종응 의해서 세워졌다. 비문은 조진관이 지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기간은 197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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