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문정왕후는 왜 악녀이고 명성황후는 왜 위인으로 평가받을까?

patrica1977 2024. 1. 9.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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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문정왕후는 1565년 사망 후 죽은 지 4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악녀라는 평을 벗지 못하고 있고, 명성황후는 우리나라 위인전에 보면 꼭 들어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두 여인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통점과 상반된 점이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12살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통해 조선을 20여 년 동안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독단적인 정치를 통해 섭정여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명성왕후는 당시 안동 김씨 세력이 조선을 지배하였는데 자신의 외척을 조정의 중요 관직에 등용하여 권력을 키워 정권을 장악하였고, 나중에는 고종을 능가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얻어 당시 권력욕이 있던 시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과 여러 차례 대립하며 권력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문물 개방을 핑계로 외세인 청나라와 내통하여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끌려가게 내버려 둡니다. 참고로, 명성황후가 세력 유지를 위해 외국 세력을 조선에 끌여들였는데 러시아, 청나라, 일본 이렇게 세 나라가 조선을 장약 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외국세력들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아 발판을 마련해 놓은 것은 명성황후의 탓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모의 조건은 "첫번째로 얌전한 것이 제일이고 두 번째도 어질고 착한 것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국모를 간택할 때의 기본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착하고 얌전하고 어질고 내외명부를 잘 다스리고 왕자를 많이 생산하여 왕실을 번창하게 하는 것이 국모의 자격이자 올바른 인품입니다. 이는 국모를 간택할 때 기본적으로 보는 심사 단계입니다.


그렇지만 두 여인은 기본적인 왕비의 도리를 져버리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가졌다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여인의 상반된 모습은 후궁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국왕이 죽고 3년상이 지나면 후궁들은 관례대로 궁궐을 떠나야 했는데요. 중종 사후 3년상이 끝날 당시 궐에 남아있던 후궁은 총 3명으로 소용 안씨, 숙원 홍씨, 숙용 한씨였는데 문정왕후는 선왕이 모셨던 후궁이라 하며 모두 궐에 살게 해 주어 편안한 노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소용 안씨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창빈 안씨로 그 당시에는 정3품 소용의 신분이었는데, 창빈이라는 정1품의 시호는 14대 임금으로 즉위한 선조가 자신의 외조모인 소용 안씨를 즉위 10년인 1577년 3월 24일 정1품인  창빈으로 추봉한 것입니다. 숙원 홍씨는 문정왕후의 배려로 계속 궐에 살면서 종2품 숙의로 품계까지 올려 받았고, 숙용 한씨의 경우 중종의 가계도인 선원계보에 기록 안된 후궁인데 그녀 역시 중종 사후 문정왕후의 보호아래 궐에 살면서 종2품 숙의로 한 단계 올랐습니다. 숙의 한씨는 문정왕후의 유언에 따라 명종과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계속 궐에 살면서 선조대왕 즉위 4년에는 정2품 소의의 첩지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종1품 귀인에 올랐습니다. 귀인 한씨는 선조 8년인 1575년 3월 9일 76세로 사망한 오래 장수한 후궁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문정왕후는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선왕에게 적극적으로 후궁을 권할 것을 건하였고 이에 감탄한 중종이 사례를 내린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투기하지 않아 선대왕(중종)과 자순대비의 각별한 배려를 받았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문정왕후는 선왕이 모셨던 후궁들에게는 각별한 대접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는 문정왕후와는 달리 고종의 후궁들에 매우 상반된 행동을 보였는데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후궁을 둘 때마다 결코 불편한 심기를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은 명성황후가 두려워 후궁을 마음대로 두지 못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와중에도 많은 후궁을 둔 고종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후궁 중에서 영보당 이씨로 알려진 귀인 이씨가 아들 완화군을 낳은 뒤로 잦은 암투가 있었고, 결국  귀인 이씨와 완화군을 대궐 밖으로 출궁 시킵니다. 얼마 후에 완화군이 사망하였는데 당시 완화군의 사망 원인으로 명성황후가 개입한 독살설로 당시 널리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고종의 또 다른 후궁인 귀인 장씨도 1877년 아들 의친왕을 낳은 뒤에 명성황후에 의해 강제로 출궁 됩니다,

 

고종의 또 다른 여인인 순헌왕귀비 엄씨는 원래 고종의 지밀상궁으로 있다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던 32살에 고종의 승은 입은 사실이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습니다. 다행히 명성황후가 사망한 후에 고종의 부름으로 다시 궁궐에 들어올 수 있었고 45살에 의민태자를 낳은 뒤에 정식으로 종1품 귀인으로 정식 후궁이 되었습니다. 그 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 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습니다. 순헌왕귀비 엄씨의 가장 큰 업적은 3개의 학교를 설립했는데 지금의 양정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입니다. 아마 명성황후가 일찍 안 죽었다면 3개 학교는 아마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3명의 후궁을 내칠 때 당시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실 어른의 윤허나 허락 없이 독단적인 행동을 한 번도 아닌 무려 3명의 후궁을 퇴출시킨 행동은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고 국모로서의 자질과 처신에도 충분히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문정왕후의 행실이 아름답고 명성황후의 행실은 분명히 왕후답지 못한데요,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서 볼때 명성황후의 행실은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으나 솔직히 내 남편이 다른 여성을 들이는데 참는다는 건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사실 오히려 문정왕후의 행실이 여자 입장에서는 이해가 잘 안 가는 행동입니다.

 

선왕 사후 3년상이 끝나고 후궁들이 궐에서 나가려고 할 때 대부분 왕후들은 전례니까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비해 문정왕후만큼은 유독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후궁들을 궐에서 살게 해 주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역대 왕후들도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 때 충분한 입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건 문정왕후가 왜 굳이 전례와 국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선왕의 후궁들을 궁궐에 머무르게 배려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정왕후처럼 남편인 중종을 같이 섬기던 후궁을 궁궐에 같이 살게 해주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문정왕후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여걸이나 여황제로 알려진 인물 중에서 후궁을 같이 살게 배려해준 여성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한 남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고 갈망하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웃고 살을 섞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여자들은 남자와는 달라 설사 아량을 베푼다고 해도 남편의 여인에 대해서는 웬만한 쿨한 성격이 아닌 이상 절대로 아량을 베풀지 않습니다. 대부분 여성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다시말해 근본적으로 남자가 베푸는 아량과 여자가 베푸는 아량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의 이런 특성을 반영한다면 문정왕후는 일반적인 여성들과 비교하자면 쿨한 성격인 셈입니다.

 

문정왕후의 이런 행동은 그녀의 숭유억제 숭불정책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불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베풀어야 한다는 기본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의 대부분 정치와 관련된 정책적인 부분들은 불교적 특성을 강하게 띄고 있습니다. 문정왕후가 같이 모셨던 후궁들을 모두 궁궐에 살게 해 준 것도 그녀가 불교이념을 받아들여 선왕의 후궁들에게 각별하게 대한 것이지 가진 자로서의 아량으로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여성들은 아무리 가질 걸 가졌다고 해도 남편의 여자들에게까지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문정왕후가 정난정을 총애한 이유도 단순히 천한 신분이라고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녀의 동생 윤원형도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아 정난정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아 정난정은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충복이 됩니다. 

 

이와 같은 불심의 연장선에서 문정왕후는 서얼허통법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사실 조선은 3대 임금인 태종이 서얼금고법이라 하여 신분에 차별을 두는 최초의 서얼차대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이후로 조선사회에서 적서에 대한 차별이 심했으나 윤원형은 명종 8년 10월 삼정승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고를 올리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래 주소에서 확인해 주세요.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10007_001

 

조선왕조실록

○庚辰/領議政沈連源、左議政尙震、右議政尹漑、左贊成尹元衡議: "謹按《禮典》諸科條: ‘庶孽子孫, 勿許赴文ㆍ武科、生員ㆍ進士試。’ 如以爲庶孽, 多是倡女及婢子所出, 不可齒諸士類, 則

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 사이버 복원 : 명종 8년 10월 7일 경진)

 

이에 대해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했으나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하여 결국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서얼허통법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이념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의 지지를 받아 통과시킬 수 있었고 문정왕후는 이 서얼허통법을 통해 숭불정책을 강화하기로 결심합니다. 서얼허통법이 통과되자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윤원형의 저택으로 몰려들었으며, 이를 명종실록에서는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다른 업적으로 1550년 12월 선 · 교(禪敎) 양과를 복원하는 동시에 철폐된 승과를 부활시켰고, 승려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 겸 봉은사 주지로 임명 후 1551년 11월 부활한 승과인 송경시험이 시행되었는데 선종 합격자 21명과 교종 합격자 12명이 유능한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첫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 유정이 배출되었고 그 후에 사명당 유정이라는 큰 인물을 발굴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추후 임진왜란 극복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업적으로 봤을 때에는 문정왕후에게 좀 더 마음이 기울 수도 있으나 두 여인의 평판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두 여인의 결말입니다. 문정왕후가 조선을 지배할 때에는 문정왕후의 별명은 '섭정여왕'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맞서지 못하였고 문정왕후는 제왕처럼 혼자서 조선을 20년 동안 지배하다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죽었습니다. 권력을 누릴 것을 다 누렸다 편안하게 죽었으니 더더욱 그녀에 대한 평판이 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록을 기록하는 사림들은 사대부 정신에 어긋나는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한 문정왕후에 대해 실록에 악평을 남긴 것이고 후대에 우리들은 그 기록만을 보고 악녀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문정왕후가 내세웠던 숭불정책과 서출차별금지법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교사상이 짙었던 조정대신들과 사대부들의 강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문정왕후 사후에 모든 정책이 폐기됩니다.

 

그리고 실록에서는 문정왕후 못지않게 승려 보우도 시대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친 요부라는 악평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 못지 않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나, 불교계에서는 승려 보우를 불교가 위축되던 조선시절 불교 중흥을 위해 앞장선 위인으로 현재까지 추앙받고 있습니다. 같은 인물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요부가 될 수도 있고 위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영국의 위인으로 알려진 넬슨 제독의 경우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그가 전사한 트라팔가르 전투 참전 당시 그는 나폴리에서 만난 여성과 바람나 결혼을 약속하고 트라팔가르 전투 후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할 계획을 세웠으나 전사하는 바람에 영웅으로 남게 됩니다. 만약에 살아남았다면 그의 평가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고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넬슨에 대한 생각도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경우 그녀의 결말... 즉 그녀는 일본인에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암살을 시도했으며 그 대상이 왜 명성황후였을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녀가 일본인에게 거슬렸기 때문에 시해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거슬린 이유는 사사건건 국정에 관여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모의 역할은 내외명부만 잘 다스리는 것이 전부인데 왜 정치에 나서서 권력을 잡았고 결국 일본인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일본인 손에 죽은 것은 본인의 권력에 집착하다 결국 일본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닐지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위인이라는 이미지로 세척된 이유는 바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오랜 세월을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현재까지 일본에 대한 좋은 인식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명성황후는 어찌 되었던 조선의 왕비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왕비였기에 우리가 제일 안 좋아하는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이유만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이미지 세탁에 크게 기여한 것이 있다면 바로 드라마, 사극에서 명성황후가 말했던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사실 명성황후는 실제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굳이 명성황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왕비라도 일본인들이 중궁전을 침범하여 칼을 들이댔다면 모두 똑같거나 비슷하게 처신하지 않았을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역사에서 가장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여인이 두 명 있다면 문정왕후와 장희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두 여인에 대한 안 좋은 평을 많기 남겼기 때문이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두 여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많이 세뇌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때까지 쌓아왔던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사기록은 고지 고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단점도 있으면 분명히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정왕후의 부정적인 면이 보인 또 다른 큰 사유는 권력입니다. 문정왕후는 입궁 초창기 당시 반정공신의 위세에  눌린 남편 중종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폐위된 단경왕후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위협을 충분히 받았고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낳아 권력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연달아 3명의 딸을 출산하면서 그녀는 언젠가는 폐출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중되었고 결국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출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겨 권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문정왕후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유로 양아들인 인종과의 관계입니다. 솔직히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보았을 때 인종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와 문정왕후 아들인 경원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파가 대립했습니다. 대윤파는 인종의 외숙인 윤임이 주도했고 소윤파는 문정왕후 동생인 윤원형이 주도했습니다. 그러니 문정왕후 입장에서는 인종을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특히 아들인 경원대군이 태어난 이후에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더더욱 인종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종과의 안 좋은 관계는 대부분 정사가 아닌 야사로 전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는 부분도 실제와는 다른 부분입니다. 임금에게 올리는 모든 음식은 기미상궁이 음식에 독을 타서 올렸는지 확인 후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설사 친어머니가 주는 음식이라고 해도 중간과정에서 누가 톡을 탔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음식 하나하나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야 하므로 문정왕후가 주는 떡을 먹고 죽었다는 야사 내용 자체는 어패가 심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족 간의 불화, 참화는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원경왕후 형제까지 모두 죽였고, 세종의 정비였던 소헌왕후의 가문까지 말살시켜 버렸습니다. 세조도 마찬가지로 형제들을 죽이고 단종을 죽이면서까지 보위에 올랐고 왕위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광해군도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오점을 남겼고 인조도 소현세자와 민회빈 그리고 손자들까지 귀양 보내고 죽이는 천륜을 어기는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들이 왜 피에 손을 묻혀서까지 가족들을 죽이거나 오해를 받았을까요? 그건 바로 권력 때문입니다. 권력을 한번 가지게 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가족도 죽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자신이 살아남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권력이 필요할까요? 권력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모함을 받아 역모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녕대군과 제안대군은 왜 풍류객으로 전전하며 살았을까요? 임금이 죽으면 자신들이 적통 1순위 후계자였고 자신들이 똑똑하면 지인의 추대를 받아 역모로 몰려서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풍류객으로 살아 처신하면서 목숨을 보존했던 것입니다. 세종 재위시절에 양녕대군이 조정대신들로부터 평생동안 수 많은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은 양녕대군을 지켜주기 위해 몇번의 귀양살이로 마무리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정왕후가 인종을 멀리한 것은 어떻게 보면 아들인 경원대군과 문정왕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비정한 정치세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 문정왕후의 성품만을 탓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한 국가였기 때문에 문정왕후, 명성왕후 같은 여걸은 존재 자체만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문정왕후가 명종 즉위 이후까지 명종을 무시하고 20년 넘게 섭정여왕으로 군림한 부분은 분명히 그녀의 과실이며, 명성황후와 같이 두 여인 모두 지나친 권력의 욕구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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