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이야기 32

장희빈은 정말 희대의 악녀인가? 역사기록으로 본 실제 모습!

[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URL 추가 ] 조선의 3대 요녀" 중에서 3명을 꼽으라면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장희빈이 들어간다는 데에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장희빈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와 이미지에는 이미 완전히 악녀 이미지로 자리 잡힌 여인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이 악녀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해보거나 겪어본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단지 동화책, 소설,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선생님들도 악녀라고 가르쳐주었기에 어느덧 장희빈은 들어보지 않고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되는 뻔한 악녀이기 때문에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이 악녀라고 단정지을 만한 물증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 동영상으로 보았듯이..

역사이야기 2024.01.11

TVN '어쩌다 어른' 프로에서 설민석 강사의 장희빈 편 강의를 보고..

[출처 : 직접 작성 + 카카오TV + 조선왕조실록 + 인터넷 검색] 설민석 역사 강사가 잘못된 이집트 역사에 대해 전문가에 대한 질타를 받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 사실 그전에도 문제가 된 강의는 있었다. 단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옅은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강의하다 보니 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 원래 TV는 잘 안 보는 편인데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2016년 6월 9일 자로 방영된 TVN '어쩌다 어른' 프로그램에서 설민석 강사가 장희빈 편에 대해 방영한 내용을 보고 이건 좀 아니다고 느낀 내용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역사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방송에서 그것도 외국인 방청객이 있는 상황에서 강의할 올바른 내용은 아니라..

역사이야기 2024.01.10

스페인 민족의 역사와 구성

[출처 : 직접 작성 + 일부 인터넷 검색 ] 1. 최초의 원주민은 이베리아인(또는 이베로족)으로 북부아프리카에서 BC 3000년 전 이베리아(스페인 반도의 전체적인 지명이름)로 이주 2. BC 800년 전에는 소수 그리스인이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 이주함 3. BC 700년전에는 소수 페니키아인이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이주함 4. BC 600년전에는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옴 - 이베리아인과 켈트족의 혼혈민족을 켈티베로족이라고 부름 - 켈티베로족은 나중에 게르만족에게 쫓겨 북쪽 갈리시아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어 갈리시아인으로도 부름) - 이베리아인과 켈트족의 혼혈을 켈티베로족 또는 갈리시아인으로 부름 5. 바스크족이 이주했는데, 언제 이베리아로 왔고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

역사이야기 2024.01.10

독일이 동독, 서독으로 분열되었던 이유

[출처 : 직접 작성 + 이미지 인터넷 검색 ]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독일은 왜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일으켰고 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졌을까? 물론 지금은 다시 통일되어 한 나라가 되었지만 왜 그렇게 나뉘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독일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배운 적이 있지만 다시한번 서술해본다. 로마제국의 평화시대(Pax Romana)가 300년 동안 지속된 후에 로마는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그 당시 유럽 북쪽지방에 골고루 퍼져 살았던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침략을 받아 이를 피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를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라고 한다. 결국 게르만족으로 가득 찬 서로마제국은 476년 오도아케르 장군..

역사이야기 2024.01.09

조선시대 후궁에서 왕비, 왕후가 된 여인들 소개

[출처 : 직접 작성 ] 1. 신덕왕후 강씨 고려시대 법으로 따지자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갔지만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가 조선개국 동시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코스로 보면 후궁출신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법으로 따지자면 조선시대에는 부인은 1명밖에 없으므로 둘째 부인 출신 왕비라는 표현보다는 후궁 출신 왕비로 해석하여 올립니다.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참고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사후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후궁으로 강등되어 무려 300년동안 후궁의 신분으로 있다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되고 신주를 종묘로 들여왔으며, 태종에 의해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되었다. 또한 음력 8월 20일에는 존호를 순원현경신덕(順元顯敬神德)으로 ..

역사이야기 2024.01.09

주초위왕 사건의 주모자 희빈 홍씨

[출처 : 직접 작성 + 조선왕조실록]  희빈 홍씨는 중종의 후궁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박원종을 도와 반정 1등 공신에 책봉된 남양군 홍경주의 둘째 딸이며 세조시대에 정승을 지냈던 정인지의 외가 쪽 증손녀이다. 홍경주는 정인지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SBS TV 여인천하와 시중의 대부분에 나와있는 소설에는 희빈이 홍경주의 소실의 딸로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 홍경주는 정실인 권씨부인에게서 1남 2녀를 두었고, 첩실에게는 1남을 두었다. 정실 아들은 충훈도사를 지낸 홍우룡(신숙주의 손녀사위)이고, 첩실에게서 낳은 자식은 홍우귀이다. 홍우룡은 부인 신씨가 소생 없이 죽자 다시 권씨 부인(권람의 증손녀)을 부인으로 맞아 3남 2녀를 두었고 희빈 홍씨의 언니는 김명윤에게 출가하여 3남 4녀를 두었다. 희빈 홍씨..

역사이야기 2024.01.09

정난정의 생애 그리고 파릉군의 상관관계

[출처 : 직접 작성 + 조선왕조실록 + 두모포의 정체 뉴스]  파주 교하읍에 파평 윤씨네의 묘소가 많이 있고, 그곳에 정난정의 묘도 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몇 번 돌아다니며 찾은 적이 있다. 그러다 간신히 윤원형의 묘를 찾았고, 윤원형의 묘역 오른쪽 뒤편에 "정윤겸의 서녀 초계 정씨 난정지 묘" 라고 쓰여 있는 조그만 비석이 있고, 야트막한 봉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바로 옆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파평 윤공 원형지 묘"라고 기록되어 있는 윤원형의 묘가 있다. 보통의 경우 본부인이 합장을 하는 데 어찌 되었건 당시는 정난정이 윤원형의 본부인이라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봉분이 작고 첩으로 인정했다면 같은 묘역 안에 봉분을 쓴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2001년에 인기리에 ..

역사이야기 2024.01.09

문정왕후는 왜 악녀이고 명성황후는 왜 위인으로 평가받을까?

[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문정왕후는 1565년 사망 후 죽은 지 4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악녀라는 평을 벗지 못하고 있고, 명성황후는 우리나라 위인전에 보면 꼭 들어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두 여인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통점과 상반된 점이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12살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통해 조선을 20여 년 동안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독단적인 정치를 통해 섭정여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명성왕후는 당시 안동 김씨 세력이 조선을 지배하였는데 자신의 외척을 조정의 중요 관직에 등용하여 권력을 키워 정권을 장악하였고, 나중에는 고종을 능가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얻어 당시 권력욕이 있던 시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과 여러 차례 ..

역사이야기 2024.01.09

광해군은 김개시 때문에 폐위되었다!

[출처 : 직접작성 + KBS 역사스페셜 ] 김개시.. 그녀는 정말 광해군의 연인이었을까? 여러 사극에서 그녀의 일대기를 다루었지만 정작 그녀의 내면의 본모습을 그려내지는 못하였다. 김개시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도록 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조선의 3대 요부에 속하는 김개시라는 인물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희빈, 장녹수와는 다른 경우의 여인이다. 장희빈, 장녹수와 같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덩달아 같이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 점은 같지만, 이들은 모두 제왕의 후궁들이었다. 그렇지만 김개시 같은 경우는 신분이 정 5품 상궁에 불과했었고, 광해군의 후궁이 아니었고 아버지였던 선조대왕의 승은을 입은 승은상궁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김개시가 천민 출신..

역사이야기 2024.01.07

숙빈 최씨는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 원래 왕비의 자리가 비어 다음 왕비 자리를 정할 때에는 세 가지 전례대로 왕비를 책봉하였다. 첫 번째로, 전국에 간택령을 내어 처녀 간택을 통하여 왕비를 책봉하였다. 여러 간택 절차를 걸쳐 최종 3 간택까지 이르고 이 3명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3 간택에서 떨어진 두 명의 처녀는 왕실의 결정 하에 후궁으로 남겨 둘 수도 있었다, 단종대왕의 예가 있는데, 3 간택에서 붙은 정순왕후 송 씨가 왕비가 되고 나머지 두 명의 처녀들은 단종의 후궁이 되었던 전례가 있다. 두 번째로, 후궁 중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궁에서 왕비가 된 대표적인 여인은 바로 폐비 윤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배경으로 들어온 여인인데, 대표적인 왕비는 문정왕후이다..

역사이야기 2024.01.0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