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유럽 최고의 명문가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 후손들..

patrica1977 2024. 2. 1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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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명문가이며, 한때는 또 다른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경쟁하던 왕가로 현재는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공화국이 부르봉왕가로 남아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는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왕가로서는 없어졌지만 후손들이 여러 나라에 살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 부르봉 왕가의 시초

프랑스 카페 왕가의 한 갈래로 성 루이 9세의 막내아들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시조다. 유럽 최대의 가문인 카페 왕조의 방계로 몇 안 되는 샤를마뉴 때부터 족보를 추적할 수 있는 대가문이다. 근세의 경쟁자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첫 시작은 스위스의 외진 지역인 아르가우 지방의 들어보지도 못했던 백작 출신이라 정통성면에서는 부르봉에 한참 밀린다.  '부르봉'이라는 어원은 부르봉 라르샹보시로 원래는 소 영주 가문이었으나 부르봉 가문의 베아트리스가 카페 가의 로베르와 결혼함으로써 왕족의 일원이 되었다.

로베르와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루이 1세가 공작이 되었고, 이후 1488년 장 2세가 죽음으로써 그의 동생 피에르 2세가 영지를 계승하여 루이 11세의 왕녀 안느와 결혼하였다. 이들 사이의 딸인 수잔은 1505년 몽팡시 가문의 샤를과 양자 결혼을 하였으며, 이 샤를은 원수로서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서 이탈리아 전쟁 때에 활약을 하였다.

2. 프랑스에서의 부르봉 왕가

샤를 이후 직계가 단절이 되었다가 그의 일족인 방돔 공작 앙투안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의 딸 나바르 여왕 잔느와 결혼하여 위그노 교도들과 연합해 발루아 왕조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나바르의 잔느 또한 카페 왕조의 방계인 알브레 왕가 출신으로, 독실한 신교도에다 당대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위그노 전쟁에서 발루아 왕조의 섭정 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무능한 아들들을 대신하여 위그노 전쟁 당시의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면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인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잇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잔느와 그 아들을 증오했다. 잔느 또한 아들의 왕권을 주장하며 카트린을 음험한 이탈리아 여자라고 비난했다. 어찌나 사이가 나빴던지 잔느가 병으로 급사했을 때 카트린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말이 정설로 믿어졌을 정도. 그러나 아들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결국 사후에 결실을 맺게 된다. 

잔느의 자식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은 결국 앙리 4세가 되었다. 카트린은 앙숙의 아들인 앙리를 미워했으나, 그녀가 낳은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극단적인 조치로 막내딸 마르그리트를 앙리와 결혼시켜 핏줄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둘 간의 자식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의 피는 결국 단절되고,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다. 

 

나바르의 왕으로 프랑스 부르봉가의 왕으로 즉위한 앙리4세

 

앙리 4세는 프랑스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 버금가는 훌륭한 정치를 한 임금으로 프랑스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국력 신장을 비롯하여 국민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년시절 까지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점차 성장하면서 독실한 신교도가 된다. 왕이 되기 전에는 여러 정치적인 상황과 얽히면서 잠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신교로 돌아왔다. 원래 신교도적인 사상이 강했지만 프랑스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으로서의 개종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고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여 결국 완벽하게 가톨릭교도로 개종 후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앙리 4세가 완벽한 가톨릭교도로 돌아간 사건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지만 당시 오랜 내전으로 지친 프랑스 국민에게는 큰 추앙과 찬사를 받았다.

 

앙리 4세가 신교와 가톨릭을 번갈아가며 개종하고 일련의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 임금이 된 후  종교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는 피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유명한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 내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는 유럽역사에서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제도로 당시에 유럽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덕분에 신교로 구성된 지식인들이 외국으로 이주하지 않고 프랑스 상공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뛰어난 경제장관이었던 쉴리와 함께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고 귀족의 세금을 늘려서 조세 기반을 확충해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재정을 정상화시켰고, 또한 신교 세력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상공업자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상공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기반이 만들어져 백성들로부터 ‘선량왕 앙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앙리 4세는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자 국조로 만든 것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왕위에 즉위한 후 "일요일에는 반드시 모든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약속하였고 결국 이를 실천하였는데 당시에 매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한다는 건 대단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앙리 4세가 이룩한 업적을 통해 프랑스는 100년 전쟁과 종교 전쟁이라는 상처를 극복하고 유럽의 최강자로 올라섰고, 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할아버지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통해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을 이룰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유럽 제1의 강대국의 반열에 올렸고 전쟁을 통해 많은 영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와 대립하는 등 잦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많은 국가 재정이 소진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도 참여하여 결국 손자가 스페인의 왕이 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스페인을 프랑스로 합병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영국에게도 해외 식민지를 빼앗기는 등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는 무려 72년을 재위했으며 손자인 루이 15세도 59년 동안 장기집권하였다.

 

루이 15세는 초반에는 친애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인자한 모습과 선행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으나 군주 정치의 비효율적인 운영 방식과 외교 정책의 실패로 역대 프랑스 왕들 중에 가장 인기없는 왕으로 찍혔다. 그가 죽자 손자인 루이 16세가 부르봉 왕조를 이어갔으나 군주로서의 역량도 거의 없었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정책에도 일관성이 없었고 재정 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재정을 파탄 나게 하였고, 1788년에 기후악화로 인해 대흉작이 일어나자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터져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처형되었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2남 2녀를 남겼으나 4명 중 3명은 모두 요절하였다. 장남 도팽은 7살에 요절하였고, 막내 딸 소피도 1살에 죽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이 17세인데, 그는 4살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3년 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튈트리 궁전에 잠시 갇혔다. 얼마 후 아버지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루이 17세로 명목상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질적인 섭정은 그의 숙부인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가 주도하였으며 6개월 남짓 재위 후 프랑스혁명 정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3개월 동안 구두수선공 앙투앙 시몬에게 잠시 맡겨졌다. 그러나 시몬은 루이 17세에게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 그리고 중노동을 시켰고 3개월 후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마저 처형되자 다시 탕플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루이 17세는 힘든 감옥 생활과 부모 죽음의 충격 그리고 시몽의 구타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0세의 나이로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한다. 이로서 부르봉 왕가는 잠시 단절된다.

 

루이 17세 초상화

 

그 후 프랑스 혁명정부는 전쟁으로 통해 유럽국가들로부터 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공화정 체제로 유지하다 나폴레옹에 의해 잠시 보나파르트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하자마자 부르봉 왕정이 복원되어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가 루이 18세로 즉위한다. 프랑스혁명 발발 당시에는 잠시 영국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유지하였고 부르봉 왕정의 복위와 동시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루이 18세는 “혁명 당시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프랑스가 입헌군주제로 실현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그는 나름대로 혁명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해 다방면으로 국내 안정을 도모하였고 세계 최초로 회계연도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하였는데  그도 역시 루이 18세를 따라 혁명 당시 영국에서 생활을 하였고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형인 루이 18세와 같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입헌군주제를 무시하고 귀족에게 권력을 주는 등 루이 18세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국민들에게 신망을 잃어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해 강제 퇴위 되었다, 그는 왕비인 사르데냐 공주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를 통해 2남 1녀를 남겼는데, 1녀인 소피는 7살에 요절하였고 1남은 루이 19세이고 2남은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이다.

 

루이 19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족이며, 앙굴렘 공작이라는 칭호로 살다 49세라는 늦은 나이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황태자 자리에 6년 동안 머물렀으나 7월 혁명으로 아버지 샤를 10세의 강제 퇴위와 동시에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태자의 자리에 물러난 뒤에는 14년 동안 마른 백작이라는 작위로 살다 루이 드 프랑스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살다 죽는다. 그는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은 뒤로부터 68세로 죽기 전까지 부르봉 가문의 수장으로 프랑스의 적통자이자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였고 왕당파에 의해 루이 19세로 불리고 있다.

 

루이 19세 (앙굴렘 공작)의 초상화

 

루이 19세는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장녀인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와 결혼하였는데 사실상 친척간의 결혼이었다.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살아남은 자녀이자 부르봉 왕가의 공주로 마담 루아이얄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부모의 죽음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물결을 겪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녀 역시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후 탕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동생인 루이 17세와는 달리 여자이고 어리다는 이유로 잠시 감옥에 유폐되다 어머니 조국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면서 대공과의 결혼을 강요받는 등 친인척과의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초상화

 

그녀는 빈에서 불편한 삶을 살다 결혼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잠시 러시아 라트비야에 망명 중이었던 숙부 프로방스 백작(훗날 루이 18세)을 찾아간다. 프로방스 백작은 부르봉 왕가의 결집을 위해 오스트리아 대공이 아닌 자신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훗날 샤를 10세)의 아들 앙굴렘 공작과 결혼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그녀 역시 제의를 받아들여 앙굴렘 공작과 결혼 후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버킹엄셔에 정착하였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신을 찾아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시킨 후 부르봉 왕가의 복원 작업을 하던 중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들과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이 다시 실각하자 곧바로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앙굴렘 공작이 황태자가 되면서 그녀도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러나 7월 혁명으로 인해 그녀 역시 황태자비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망명길에 올라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떠돌다 72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프로스도르프에서 사망하였다.

 

샤를 10세의 둘째 아들인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역시 부르봉 왕가의 적통 왕자로 아버지인 샤를 10세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망명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왕이 되면서부터 안정적인 생활을 살다 오페라 관람 후 나오던 중 안장 제조업자로 일하던 루이 피에르 루벨이 휘두른 칼에 찔려 42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에게는 2남 2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남 1녀는 요절하고 1남 1녀만 성장하였는데 바로 앙리 5세와 마리 테레즈이다.

 

앙리 5세 (앙리 다르주아) 전신 사진

 

앙리 5세는 앙리 다르주아가 본명이며 샹포르 백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샤를 10세가 강제 퇴위 당시 9살이었는데 왕위를 포기한 루이 19세 대신 왕으로 지명되었으나 오를레옹 공작 직위만 받고 왕위를 포기한다. 그리고 전 가족이 영국에 망명하였고 10살부터는 샹포르 백작이라는 호칭으로 의례적으로 불렀다. 24살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랑스 왕위권을 주장하였고 대외적으로도  루이 18세가 내린 다르주아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고 원래 이름인 앙리 드 부르봉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름대로 왕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40년 후인 1870년 프랑스 2 제국 몰락 후에 프랑스로 돌아와  국회의 다수였던 왕당파에 들어가 부르봉 방계 왕가인 오를레앙 파와 화해하였고 왕정을 복고한 뒤에 왕으로 즉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 국기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앙리가 삼색기 사용을 반대하면서 국회의원 대다수와 충돌하여 결국 왕정복고 계획은 취소되었고 결국 제3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그는 프랑스를 떠나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여 살다 란쳉키르헨에서 62세의 나이로 죽는다. 자식 없이 그가 사망하면서 여 부르봉 가문 아르투아 방계는 단절되었고, 프랑스 왕위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에스파냐계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분쟁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된다.

 

앙리 5세의 누나인 마리 테레즈는 1살 연상으로 부르봉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고 44살에 사망한다.

 

 

3.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

17세기 말 스페인 왕위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리고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조와 경쟁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원래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국토를 분할할 비밀조약을 맺은 것이 들통나 격노하여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했다. 루이 14세는 이어 필리프를 프랑스 왕가의 후계자로 지명, 궁극적으로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패배해서 부르봉 왕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가로 분할되었다. 다만 왕위만 나눴을 뿐이지,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은 끈끈한 동맹으로 맺어져 있었다.

18세기 초반에는 결혼동맹으로 재미를 본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례와도 비슷하게 이탈리아 국가들과 결혼동맹을 추진하여 파르마 공작과 양 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1860년 이탈리아 통합 과정에서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전쟁 직후 사정을 수습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해 한 세기 간의 평화를 가져왔으나,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다시 쇠약해졌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 두 번이나 왕위에서 밀려났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해 재위 중이다.

사실 혈통을 부계 기준으로 적용할 경우 현재의 스페인 왕실은 여왕인 이사벨 2세의 후손이라 엄밀히 말해 부르봉이 아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사촌오빠인 부르봉 가문의 카디즈 공작 프란시스코와 결혼했으나, 정략결혼인 탓에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고 결국 여왕은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엄한 남자에게서 아들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이 훗날 알폰소 12세로 왕위까지 올랐다. 물론 공식상으로는 부르봉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르봉 왕조로 불린다. 

사실 이 혈통 문제는 당시에도 꽤나 민감한 문제였던지라, 여왕의 삼촌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카를로스 5세)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여자인 이사벨 2세 및 사생아인 알폰소 2세보다는 직계인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며 본인, 아들, 손자 3대가 무려 3번에 걸쳐 내전을 주도한 일도 있었다. 이 카를로스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스페인에서는 까를리스타, 즉 카를로스파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동안 저런 건 아니고, 까를리스타 자체가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를 넘어 종교적 보수주의, 지역별 자치 문제 등을 둘러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했기에 그랬다. 실제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말년에 입헌군주제를 구상할 당시 그가 새로운 왕으로 누구의 혈통을 지명하느냐가 당시 스페인 정가의 최대 관심사였는데, 결국 그는 카를로스 5세의 후손 카를로스 우고 대신 이사벨 2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손을 들어주어 지금과 같이 왕위에 오르게 했다.

 


3. 룩셈부르크의 부르봉 왕가

룩셈부르크는 현 앙리 대공의 할아버지인 펠릭스 공작이 샤를로트 여대공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쟝 대공이 대공위를 이어받은 1964년부터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본다.

 

※ 참고자료 ※

 

프랑스와 경쟁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들은 현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관련 동영상이 올라왔는데 흑인도 있어 놀라웠다. 그나마 혈연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결혼하면서 주걱턱이 사라진 건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본다. 한번 시청해 보자.

 

자기 전 한 알! '푸응 나이트버닝'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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