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유럽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전쟁들이 있었는데 왕위계승전쟁이 많았고, 특히 남의 나라의 왕위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나라이기에 앞서 혈연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서양국가들은 혈연관계로 뭉쳐있고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타국의 왕실 후계자가 자신의 혈연관계라면 간섭할 명분이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는 동양과는 달리 모계 후손도 후계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 시집가서 낳은 공주의 아들이 내 나라의 후계자가 없게 되면왕이 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황에 따라 두 나라가 잠시 한나라로 합쳐졌다가 나중에 그 왕이 낳은 여러 아들들에게 나라를 각각 떼어주고 이렇게 되면 남이 아니라 형제의 나라가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니 남의 나라 후계자문제에 간섭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리카 법전" 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6세기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다스리던 초기 중세 시대에 프랑크족의 지족인 살리족을 관할하도록 편찬한 전통 법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살리카 법이 매우 오래된 관례를 반영하였음에도, 살리카법이 완성된 날은 507에서 511년 사이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왕위계승방식에서의 살리카 법은 여성의 경우 어떠한 경우에도 상속권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남자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법은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에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같은 경우 같은 게르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살리카법전과는 무관했는데요.
대표적으로 튜더왕가의 에드워드 6세 사망 후 제인 그레이가 새로운 영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른 이유는 그녀가 헨리 7세의 증손녀라는 모계혈통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계 혈통을 따지자면 0순위였던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공주(어머니가 스페인 공주였음) 였습니다.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되자 스페인에서 살고 있었던 메리 공주와 스페인 정부는 영국에 대대적인 파병을 하고 9일만에 제인그레이를 폐위하고 메리공주를 메리 1세로 새로운 왕비로 세웁니다. 결국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서 유폐된 후 처형됩니다. 그 후 제인 그레이는 "9일간의 여왕" "런던탑의 비극"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제 블로그에 제인 그레이에 대한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https://patrica.tistory.com/173
9일만에 폐위당한 비운의 최초 영국의 여왕 "제인 그레이"
[출처 : 직접 작성] 여왕 "제인 그레이"는 재위기간이 적어 영국 역사에 가려져 있는 인물로서,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제인 그레이에 대한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튜더왕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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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그레이의 뒤를 이어 여성의 신분으로 메리공주가 메리1세로 영국의 새로운 여왕이 됩니다. 그러나 메리 1세가 3년 만에 사망하자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1세로 오르게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여왕 중의 한 분이죠. 영국은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3명이 연속으로 여왕이 되는 진기록을 낳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스튜어트 왕가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가도 모계혈통으로 시작된 왕가입니다. 튜더왕가를 세운 헨리7세는 딸 마가레트 공주를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와 결혼시켰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5세는 메리 스튜어트를 낳았는데 메리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로 왕위에 올랐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왕이 됩니다. 그렇지만 제임스 6세는 모계혈통이라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에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왕이 됩니다. 제임스1세는 마가레트 공주의 증손자가 되는 것입니다.
헨리 7세가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와 사돈을 맺은 이유는 이 결혼으로 언젠가는 한 나라로 합쳐지기 바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는지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합병하는지에 대한 이해관계가 달랐습니다. 결국 스코틀랜드왕이 영국왕이 되었으니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통합 첫 번째 임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튜더왕가가 끝나고 하노버 왕가가 시작되면서 조지1세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1701년에 세운 왕위계승법에 따랐는데요. 제임스 1세의 딸의 외손자.. 즉 제임스1세의 증손자라는 모계혈통으로 인하여 평생을 독일에서 살다 영국 국왕으로 초대되어 영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서열상 왕위 계승 서열 3순위였으나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가톨릭교도는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서열 1,2 순위가 왕의 후보에서 탈락하면서 조지 1세가 영국의 국왕이 되어 하노버 왕가가 열립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두 가문이 있었는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부르봉 왕가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있었습니다. 두 왕가는 자존심 때문에 사소한 전쟁도 많이 하였고 여러 나라로 왕자와 공주들을 출가시켜 나중에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제 블로그에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유럽 최고의 명문가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 후손들.. (tistory.com)
유럽 최고의 명문가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 후손들..
[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명문가이며, 한때는 또 다른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경쟁하던 왕가로 현재는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공화국이 부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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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그 가문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부르봉 가문은 현재까지도 왕노릇하면서 남아있는데요. 어디냐면 바로 스페인입니다. 현재 스페인 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부르봉 왕가로 스페인은 현재 부르봉 왕가입니다. 베네룩스 중의 하나인 룩셈부르크도 부르봉 왕가입니다. 부르봉왕가는 프랑스 출신인데 왜 부르봉왕가가 스페인 왕가로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도 깁니다.
유명한 스페인의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사건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오래살지 못하게 되자 죽기 전에 후사를 정해둬야 할 상황이었는데요. 후계자 후보로 나온 사람은 총 3명 인데 요제프 폰 페르난도, 카를로스 대공, 펠리페였습니다.
요제프 폰 페르디난트는 후사를 남기지 못한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 펠리페 4세의 딸이자 카를로스 2세와 이복누나가 되는 마그가리타 테레사의 손자로, 마그가리타가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로 시집을 갔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아 공주가 다시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시집을 가서 낳은 아들이 요제프 폰 페르니난트입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에게는 누나의 손자가 되는 외가 쪽으로 5촌 조카였습니다.
그리고 카를로스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인데 핏줄이 스페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의 할아버지인 펠리페 3세의 증손자로 역시 외가쪽 증손자입니다. 펠리페 3세의 딸인 마리아 공주가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하였고 낳을 아들이 바로 레오폴트 1세이고, 레오폴트1세의 차남이 카를로스 대공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가 펠리페 3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레오폴트 1세도 후계자에 속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인지라 자신의 둘째 아들인 카를로스 대공을 스페인 왕실 후계자로 지목한 것입니다. 장남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펠리페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루이 15세의 차남으로 역시 스페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2세와 남매였던 마리아 공주가 태양왕 루이 14세와 결혼을 하여 루이 15세를 낳았고, 루이 15세의 차남이 펠리페가 되는 것입니다. 펠리페도 카를로스 2세에게는 외가 쪽으로 5촌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위들도 명목상 후계자에 포함되기 때문에 루이14세와 레오폴드 1세도 후계자에 속했고, 더군다나 레오폴트 1세는 어머니가 스페인 공주였기 때문에 더 핏줄로는 가장 유리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국가들은 자신의 이득에 맞게 후계자 3명을 지원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요제프 폰 페르디난트 - 영국, 포루투갈, 네덜란드, 바이에른, 카탈루냐, 바스크 등이 지지
카를로스 대공 - 오스트리아 지지 (레오폴트 1세 황제)
펠리페 - 프랑스 지지 (루이 14세)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는 여러 나라의 위협 속에서 결국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가가 아니었던 요제프 폰 페르난드를 후계자로 지목하여 쉽게 해결되는 듯 하였는데, 1년 뒤에 요제프 폰 페르디난트가 7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부르봉이냐 합스부르크냐 어차피 두 가문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누가 선택이 되든 전쟁도 불가피해졌습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는 갈등하다 결국 프랑스와 국경이 있는 점을 우려해 결국 프랑스의 펠리폐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가 스페인의 초대 국왕인 펠리페 5세로 왕위에 올랐고 부르봉 왕조가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의 실제 목적은 손자 펠리페를 스페인 왕으로 올린 후에 추후 스페인을 프랑스와 병합하여 스페인의 식민지까지 프랑스의 세력 하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마자 할아버지인 루이 14세를 그대로 따라 스페인을 중앙집권체제로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프랑스와 달리 지방 세력이 있었던 스페인의 각 주들이 반기를 들게 되었고, 이에 오스트리아가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주들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을 침략하여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도 전쟁이 터져, 식민지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 서양세력들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였고, 오스트리아는 이 기세를 몰아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카를로스 대공을 새로운 스페인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의 카를로스 대공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영국은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들과 오스트리아 몰래 평화조약을 맺기에 이르는데,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펠리페 5세는 자신의 후손이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다.
두 번째, 루이 14세도 자신의 후손이 스페인의 왕이 되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다.
조약의 핵심은 스페인 와 프랑스가 어떤 경우라도 한 나라로 합쳐져서는 안 된다는 취지가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동맹국 들에게 뒤통수를 맞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났습니다.
(1) 프랑스는 북아메리아 일부분을 영국에게 양도한다.
(캐나다의 퀘벡주에 있는 뉴브런즈윅,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그 외 허드슨만의 영토)
(2) 스페인의 항구도시 지브롤터를 영국에게 양도한다.
(3)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와 남 네덜란드 영토를 가져간다
(남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사르디니아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4) 프랑스의 펠리페가 스페인 왕으로 인정되지만, 프랑스와 영구 합병은 불가능하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는 얻었지만 본국과 떨어져 있는 영토여서 큰 의미가 없는 영토였으며, 결국 영국만 이득을 얻게 되는데요. 이 전쟁을 계기로 오히려 영국이 훗날 대영제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현재의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펠리페 5세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살리카 법전을 계속 고수해오다, 1713년 당시 황제였던 카를 6세가 아들이 낳지 못하자 딸인 마리아 테리지아를 황제로 올리기 위해 국사조칙을 반포하게 되는데, 주요 내용은 남자 상속인이 없는 경우엔 가장 손위의 여성이 상속할 수 있도록 상속법을 개정하고(신성로마제국은 제외) 여러 나라에게 이를 승인해 줄것을 요청합니다. 그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에 최초로 여자가 황제가 되는데 바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입니다.
물론 황제의 자리는 명목상 남편인 프란츠 1세에게 주어졌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황제 권한은 아내인 마리아 테리지아의 몫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카를 6세가 죽자 주변 나라들이 그녀의 합스부르크 가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속권의 자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고, 독일의 제후들도 그녀의 먼 친척인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인 카를을 카를 7세로 새로운 황제로 추대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씨앗이 되어 결국 합스부르크가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들이 서로 자신이야 말로 합스부르크 가의 영토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며 오스트리아로 쳐들어 가는데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 - 1748년)입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전쟁 선포도 없이 먼저 합스부르크가 의 영토인 슐레지엔을 공격합니다. 이에 대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결사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23살이었던 데다가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1741년 3월 13일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 요제프를 무사히 낳아 국내 사기가 치솟아 오릅니다. 참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인 프란츠 1세와 금실이 좋아 5남 11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중에 나중에 프랑스 왕비가 되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11번째 딸입니다.
먼저 1741년 6월 25일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러나 그 후,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를 알브레히트 마저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테레지아는 바이에른과 전쟁을 치르기로 결의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전비가 갈수록 줄어든 데다가 원군도 없고, 궁정의 중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1741년에 헝가리로 가서9월 11일에 열린 헝가리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군자금과 병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가 및 강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후 전황은 대역전을 거듭하며, 한때는 신성로마제국황제 자리를 카를 알브레히트(카를 7세)에게 빼앗겼지만, 카를 사후에 탈환하여 1745년 10월 4일에 남편 프란츠 1세를 다시 황제로 복원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에게는 군대의 질 등의 격차로 인해 연패를 거듭하여 1745년 드리스덴 조약을 맺어 슐레지엔의 프로이센 영유를 승인하였고, 프랑스와의 전쟁은 한동안 더 계속되다가 프랑스와 대립하던 영국과 손을 잡아, 최종적으로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어 프라그마티셰 장코치온, 즉 국본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게 되어 인정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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