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전성기 백제의 영토는 고구려보다 넓었다

patrica1977 2024. 2.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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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사진 검색]

 

지금으로부터 수 십년 전, 한 재야학자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엮은 ‘비류 백제’라는 책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필자 서고에서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때 읽은 내용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는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 가 잘 되어서 나라가 번창했으나,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여 물이 짜서 농사가 안되어 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기 ‘비류 백제’에 의하면, 형 비류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어찌 물이 짠 곳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즉, 비류는 대 해양국가 건설의 꿈을 안고 미추홀에 도읍을 정한 것이며, 그 결과 중국 동부지역 일대와 일본까지 경영하여 , 원래 의도 대로 대 해양제국을 건설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위지 동이전의 한 구절을 들고 있다. 즉, “이웃나라 백제에 구원을 청하여 백제 구원 군이 하루 만에 도착하여 적을 물리치고 돌아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 본토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학자들은, 백제 군이 어떤 이유로 중국 땅에 주둔해 있었거나 아니면 우리나라 백제 국이 아닌 ‘백제’라는 지역이나 군, 현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 신채호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백제 국이 중국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음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近仇首)는 군국대권을 대신 행사하여 침입해 오는 고구려를 격퇴하 고 대동강 이남을 완전 병탄하였다. 그리고 해군을 확장하여 중국대륙을 침입하였다. 이 때 그는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 진평두 개 군을 설치하였다. 또 녹산(지금의 하얼빈)까지 쳐 들어가서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 원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 일대에는 진왕 부견 이 강성하였으나 근구수가 이들과 싸워 산동 등지를 정벌하였다. 남으로는 지금의 강소, 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있던 진을 쳐서 병탄하였다.

 

 

근구수는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 단 한차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을 뿐이지만, 태자로 있던 10여년 동안에 중국 대륙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양서’와 ‘송서’ 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서에서 “百濟, 略有遼西晉平郡(백제, 약유요서진평군; 백제는 요서의 진평군을 쳐서 차지하였다 )”라 적고 있으며, 자치통감에서 “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殘破, 西徙近燕(부여, 초거녹산, 위백제잔파, 서사근연; 부여 는 처음에 녹산에 터를 잡고 있었으나 백제에게 깨져서 서쪽으로 옮겨 연나라 가까운 곳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진서, 위서, 남제서 등에는 왜 이런 사실들이 기제되어 있지 않을까?

진서는 당 태종이 저술한 것이니, 그가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할 때 그 장수와 사졸들을 고무하기 위하여 수치스러운 내용을 일 부러 뺐을 것으로 보이며, 위서나 남제서는 당 태종 이전의 것이지만 같은 이유로 뺀 것으로 보이고, ‘양서’나 ‘송서’의 내용은 너무 간략하여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백제본기에는 왜 이런 사실이 없을까?  이것은 통일신라 이후 백제를 과소 평가하고자 하는 경향과 사대주의 경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동쪽 거의 반을 정벌한 백제가 그 후 이를 어떻게 경영했는지 사서에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100여년이 지난 기원 479년에 동성왕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하였지만, 천품이 숙성하고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어, 고구려와 위를 쳐서 국난을 극복하였고, 지금의 산동, 절강 등지의 땅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쳐서 완전 속국으로 만들었다. 역시 삼국사기에는 이런 사실이 빠져 있다. 

 

그 이후 중국 영토 와 일본 영토를 어떻게 경영했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백제 왕실과 당시 왜국 왕실이 어떤 식이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무녕왕의 아명과 당시 일본 왕의 이름이 동일, 사이메이 여왕이 총력을 기우려 백제를 구원한 것 등), 백제가 라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사직이 위 태로울 때, 윤충 장군이 월주(지금의 상해 남쪽 지역)에 진을 치고 당의 강남부를 전부 삼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본국 의 모함을 받아 파직 소환된 것을 보면, 중국의 동쪽은 백제와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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