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스토리

역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존경했던 이유와 음악 역사에 끼친 영향 2

patrica1977 2024. 1. 1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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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베토벤은 클래식음악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현대에서 가장 알려진 작곡가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알려진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음악사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가 과연 음악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 번 알아보자.

 

1. 음악가의 인식과 신분을 바꿨다!

전에 올린 글에서도 상세하게 안내했지만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들의 예술인들의 신분은 귀족에 고용되어 귀족에 고용된 사람으로 귀족에게 고용되어야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예술가들은 귀족과 근로계약서를 체결한 뒤에 의 입장에서 철저히 외면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음악가를 귀족과 다른 하나의 인격체, 예술인으로서 가치를 드높여 주었고 베토벤 사후의 모든 작곡가들은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존경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베토벤 사후부터 귀족과 예술가는 갑과 을이라는 관계가 없어지고 동료, 동지자, 친구로서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세한 내용은 1편에 올린 게시물을 참고하면 된다.

 

https://patrica.tistory.com/68

 

역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존경했던 이유와 음악 역사에 끼친 영향 1

악성 베토벤은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기 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베토벤 이후에 활동했던 유명한 대다수의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가장 존경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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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음악사 최초로 음악에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넣었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자신이 작곡한 음악에 자신의 감정을 넣을 수 없었다. 유명한 바하,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인 귀족이 요구하는 음악만을 작곡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감정을 넣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귀족과의 고용관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음악가라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서 자신의 음악에 다양한 감정을 넣어 작곡함으로 인해 훌륭한 명곡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결과로 인해 음악가들은 자신의 감정에 따른 음악을 작곡 할 수 있었기에 베토벤이 낭만파의 문을 열게 만들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음악사 최초로 작품번호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Opus 작품번호는 베토벤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작품번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갑인 귀족이 요구하는 일회성 음악을 작곡하다 보니 말 그대로 한번 연주하고 버려지거나 잊히는 곡들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풍부하여 표현함으로 인해 자신의 음악에 대해 후대까지 잊지 않을 영원하고 진정한 작품이라고 인정하였고 그러기에 출판할 때마다 작품 번호를 직접 붙인 최초의 작곡가가 된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작품번호가 없기에 여러 음악 연구가들이 작품순서대로 정리하여 자신의 이름을 넣은 작품번호를 만드는데 대표적인 경우에 오스트리아 식물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루드비히 쾨헬이 모차르트의 작품 정리하면서 만든 퀘헬 넘버(Kv)이다.(Kv) 이다.

 

 

4. 피아노 소나타를 최초로 진정한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베토벤 이전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작품이라는 인식으로 작곡한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음악을 만들기 전에 연습용으로 작곡한 연솝곡이다.. 따라서 베토벤 이전에는 소나타라고는 부르지만 실제로는 연습곡인 셈이다. 예를 들어 소나타를 작곡한 뒤에 제자들에게 소나타(연습곡)를(연솝곡) 토대로 작곡해 보라고 제자들에게 주는 곡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소나타에 다양한 혁명적인 시도를 하면서 피아노 소나타는 연습곡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 변신에 성공한다.

 

5. 음악사 최초로 악보 출판에 기여하였다!

베토벤 시절 당시에는 이미 인쇄술이 발전하여 인쇄술을 토대로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유일하게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악보 출판이었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은 오선지에 작곡을 마치면 필사가들이 깨끗하게 정리하여 수기로 최종 악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베토벤의 악필이 문제였다. 베토벤이 워낙 유명한 악필로 유명하다 보니 필사가들이 베토벤의 악보를 필사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고 이를 보다 못한 베토벤은 직접 출판사를 통해 정식 악보 출판을 요구하여 그때부터 모든 음악 악보는 출판사를 통해 깔끔하게 인쇄된 악보로 출판된다. 베토벤 피아노 3중주 op.1이 음악사 최초로 깔끔한 출판악보로 출판된 작품이다.

 

6. 피아노 성능과 개량 발전에 기여하였다!

베토벤 이전에는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로 주로 연주하다 베토벤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가 발명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베토벤의 피아노 곡들이 대부분 격한 감정을 주입하다 보니 초기 피아노가 튼튼하지 못하여 피아노 줄이 연달아 끊어지는 현상이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베토벤은 수차례 피아노를 바꿨으며 피아노 제작업체는 그때마다 새로운 피아노를 주었지만 베토벤은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제작업체에 직접 이런 식으로 개조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꾸준히 요청하게 되면서 베토벤의 지속적인 요구로 만들어진 피아노는 바로 베토벤에게 전달되어 가장 먼저 성능테스트를 하였고 그 뒤로 계속 베토벤의 의견을 통해 피아노의 성능이 급수학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7. 음악가 최초로 카덴짜를 직접 작곡하였다!

이 부분은 음악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며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이다. 카덴짜가 뭐냐면 협주곡을 연주할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 독주 부분이 나오면 독주연주 부분을 작곡가가 직접 작곡하는 것이었다. 베토벤 이전의 협주곡들은 독주 부분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연주자들이 자신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형태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황제 협주곡에서 최초로 카덴짜를 작곡하면서부터 후대의 모든 작곡가들은 협주곡 작곡 시 스스로 카덴짜를 직접 작곡하게 된다.

 

8.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혁명적인 기여를 하였다!

현대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면 누구나 클래식음악을 찾아서 들으면 되지만 베토벤 이전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귀족들의 음악, 귀족만을 위한 음악이었다. 평민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귀족과의 고용관계를 무시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면서 서민들을 위한 많은 음악을 작곡하면서 클래식 음악 = 귀족 음악”이라는” 공식을 깨고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다.

 

9. 음악가 최초로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현대에는 콘서트 홀이 대중화가 되어 있지만 베토벤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귀족이 요청하는 음악들은 대체로 무도회나 사교의 장에서 부수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용도로 작곡했기 때문에 콘서트 홀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한 번 연주된 후에 버려지거나 잊히는 곡이었기 때문에 작곡가 스스로도 콘서트를 한다는 걸 생각조차 못했다. 1690년 런던 찰스가에 세계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콘서트홀이 들어섰고 1775년에는 1000석 규모의 하노버 스퀘어 룸이 위풍당당하게 개관했지만 이것이 전부였고 이마저도 귀족들의 오페라 관람용 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악가 최초로 1800년 직접 음악회를 기획하여 콘서트를 제작했으며 당시에는 콘서트홀이 없어 후원자였던 귀족의 집을 콘서트홀로 개조하여 이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귀족들 사이에는 자신의 집을 콘서트 홀로 이용해 달라는 요구사항이 많은 정도로 베토벤 음악이 큰 인기를 끌자 결국 전 국민을 대상으로 콘서트홀 건설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0.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감상 태도와 인식을 바꿔버렸다!

베토벤 이전의 작곡가 대부분은 귀족이 요청하는 사교 음악 위주로 작곡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춤추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할 일도 없었고 어떤 음악인지도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콘서트를 직접 기획하면서 귀족만의 음악은 점차 대중들에게도 개방되었으며,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은 춤추면서 즐기면서 부수적으로 듣는 음악이 아닌 눈 감고 진지하게 듣는 감상 태도를 바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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