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스토리

역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존경했던 이유와 음악 역사에 끼친 영향 1

patrica1977 2024. 1. 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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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악성 베토벤은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기 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베토벤 이후에 활동했던 유명한 대다수의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가장 존경한다는 기록들을 많은 음악가들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음악가들의 '위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음악가를 포함하여 대부분 예술가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고, 대부분 현대인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오래전의 예술가들은 이런 신분이 아니었다.

 

바로크, 고전파 시대 예술가들은 음악가, 미술가 모두 어느 귀족에게 소속된 '고용인'에 불과했고 이들에게 매달마다 월급을 받는 직업이었다. 이런 위치에 있었던 만큼 음악가들이 작곡하는 곡들은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채용해 준 귀족의 입맛과 기분에 따라 음악을 작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귀족, 왕에게 소속된 만큼 음악을 자기 마음대로 작곡하는 것도 불가능 했을 뿐더러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음악성이 인정되고 유명해지면 여행도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지만 귀족, 왕의 소속인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자신을 고용한 귀족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하찮은 고용인에 불과했으므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예술인들과는 인식이 큰 차이가 있었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하이든 같은 경우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음악 고용인으로 있었지만 그의 음악이 워낙 인기가 많아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허락 하에 연주 여행을 다닐 수 있었고, 에스테르하지의 후계자인 후작이 너무 음악에 관심이 없던 지라 말 년에 되어서 겨우 귀족 고용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모짜르트의 경우에도 대주교 소속 전담음악가였는데,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말년에는 아르코 백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 끝에 간신히 귀족의 고용인이라는 족쇄를 푸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결국 물질적인 지원이 끊기다 보니 비참하게 가난한 말 년을 보냈다. 

 

음악가들이 귀족의 고용인이 되었던 이유는 한 귀족의 소속으로 들어가면 정기적인 지원과 꾸준한 급여를 받을 수 있어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음악가는 귀족의 물질적인 도움과 지원이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귀족을 위해 음악을 갖다 바치는 시다발이 존재였다. 그나마 유명했던 바흐, 비발디, 하이든 같은 소수의 작곡가들만 그나마 수입과 명성을 얻었을 뿐 대부분 인기 없는 작곡가들은 귀족들의 입 맛에 맞는 음악을 작곡해 주는 사람에 불과했으므로 음악가에 대한 인식도 당연히 오늘날과 같이 하나의 인격을 갖춘 예술인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같은 음악가들의 현실을 탈피하고 인식을 바꿔버린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우선 베토벤 성격 자체가 워낙 튀고 싶어하고 어디를 다니면서 당당하고 별난 성격인 것도 한몫을 하는 부분도 있었다.

 

베토벤도 어느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데뷔 초창기에는 귀족 소속으로 활동해 달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지만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인이지라 금방 역정을 느껴 스스로의 힘으로 작곡을 하고 돈을 버는 본격적인 독립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다. 베토벤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그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하고 죽을 때까지 무려 80여 차례 이사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는 귀족 밑에서 궁정 안에서 머무르면서 작곡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베토벤의 음악이 날로 인기가 많아지자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베토벤에게 레슨을 받기를 원하여 먼저 다가왔고, 베토벤은 이런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수 많은 제자들을 두었고 많은 여성 제자들과 러브 스토리가 전해진다. 

 

이때까지 베토벤은 어느 예술가들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음악을 작곡하는 자신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스스로 높이고 치켜세웠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독일의 대 문호인 괴테와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었다.

 

 베토벤과 괴테와의 인연은 베토벤의 친구인 베티나 브렌타노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브렌타노는 베토벤을 알기 이전부터 괴테와 친분이 있었고 베토벤과 괴테는 서로를 유명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브렌타노가 베토벤을 알게 되고 베토벤에 대한 천재성과 음악성을 괴테에게 편지를 여러 번 보내 알려줌으로 인하여 베토벤과 괴테는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둘이 본격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1812년 7월 온천으로 유명한 테플리츠였다.

 

두 사람이 테플리츠에서 만나게 된 이유는 서로 만나기 위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일주일 전에 이미 테플리츠에 머물러 있었고, 레오노라 에스테의 증손녀인 오스트리아 황비도 이때 테플리츠에 머물고 있었는데 황비가 칼스바트에 있던 괴테에게 테플리츠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당시 테플리츠에는 프란츠 황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황비들, 작센 지방의 대공, 그리고 그 밖의 궁정 가족과 수행원들로 넘쳐났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이런 사람들에게 현혹될 만할 사람이 아니었다. 베토벤이 이때 있었던 일을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바른하겐 폰 멘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테플리츠에는 별로 볼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 많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뚜렷한 공적을 보인 인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혼자! 혼자! 혼자!"

 

이 편지를 썼을때 당시 베토벤은 그 유명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기 때문에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고 한다.

 

베토벤이 테플리츠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괴테는 먼저 베토벤을 찾아간다. 이때가 1812년 7월 19일이었다. 20일에는 같이 산책을 하였고, 21일 저녁에도 괴테가 베토벤을 다시 만나러 갔고, 23일에도 괴테가 베토벤을 다시 찾아갔고 그때 베토벤은 괴테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흘 뒤인 7월 27일 베토벤은 테플리츠를 떠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베티나 브렌타노가 베토벤과 괴테가 모두 사망한 후에 2통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베토벤과 괴테에게 있었던 일화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한 통은 베토벤이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보낸 편지였고 다른 한 통은 베티나가 퓌클러-무스카우 왕자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8월 9일 베토벤이 브라이트코프에게 보낸 편지, 9월 9일 괴테가 첼터에게 보낸 편지도 일화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1812년 7월 20일, 두 사람은 테플리츠에서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길을 걸어가는 동안 고위층 인사들과 계속 마주쳤는데 괴테는 만날 때마다 격식을 갖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던 반면, 베토벤은 괴테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위치에 맞게 행동하라는 식으로 다그쳤다고 한다.

 

그때 마침 오스트리아 황비가 공작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베토벤은 먼저 인사하지 말고 길을 비켜주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가자고 제안했지만 괴테는 베토벤의 제안을 무시하고 모자를 벗고 황후 일행이 지나갈 수 있게 가장자리로 물러나 있었다. 반면에 베토벤은 팔을 휘저으며 대공 일행의 한복판을 황소처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가다가 모자 끝에 가볍게 손을 갖다 대는 자세만 취했다.

 

그런데 대공 일행은 베토벤이 지나가도록 공손하게 길을 터주면서 모두들 그를 향해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에 베토벤은 저만치 가서 괴테를 기다렸는데 괴테는 대공 일행이 다 지나갈때까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베토벤이 괴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선생님을 높이 사고 존경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기다렸는데 정작 선생님은 저 사람들을 지나치게 존경하는군요"

 

그 후 베토벤은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로 호우머, 쉴러, 클롬슈토크 등에 이야기하면서도 그중에 괴테를 포함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괴테에 대해 언급했을 때에도 괴테는 이제 집필 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적도 있었고, 괴테 역시 음악가인 젤터에게 "그의 작품은 늙은 가수의 노래와 같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재능에는 나도 감탄해 마지 않는다, 하나 그는 딱하게도 전혀 길들이지 않은 야성적인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도 그럴싸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세상이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유쾌한 곳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에는 베토벤에 대한 괴테의 감정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면서도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괴테의 기분이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두 사람의 성향이 달라 깊게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베토벤과 괴테는 서로에 대한 위대한 존재로서 인정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테플리츠 이후 두 사람은 그 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2년 후에 베토벤은 괴테의 시에 감명을 받아 칸타타(op.112)를 작곡하였고, 무려 8년 만에 이 곡을 초연한 후 출판한 후에  괴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1823년 2월 8일자 편지 ]

 

"이 두 개의 시 사이에 존재하는 대비는 음악으로 표현해도 그 효과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의 하모니가 당신의 시에 잘 융합했는지 알 수 있다면 저에게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말년에 이르어야 괴테에게 편지를 보냄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다시 한번 글로서 전하는 동시에 8년 만에 괴테의 곡을 출판하는 죄송함과 감사하는 마음에 대하여 충분히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화에서도 보듯이 괴테 같은 대 문호도 왕후에게는 각별한 예를 갖추어야 하는 자신을 낮추는 존재로 인식했지만 베토벤은 아무리 황후라더라도 유명한 예술가인 자신을 높여줘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이런 행동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베토벤의 이런 행동이 베토벤 입장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베토벤 사후의 작곡가들이 단순하게 귀족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귀족들의 후원을 받지 않은 순수한 음악가 자체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인정받을 수 있게 길을 열어 준 존재가 바로 베토벤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가로서의 삶을 지켜본 여러 음악가들은 좀 더 자신의 길을 돌아보고 진정한 음악가의 길을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 베토벤을 존경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일생 동안 귀족 밑에 있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독자적으로 음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후배 음악가에게 음악가로서의 진정한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단순하게 낭만파로서의 길을 열어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토벤의 이런 행동에는 귀족들의 많은 후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베토벤은 역대 작곡가와는 달리 많은 귀족들과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교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후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귀족인 친구들을 위해 헌정한 음악들이 많다.

 

귀족들의 많은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이 독자적이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하는데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베토벤은 왜 많은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아낌없이 받았던 것이었고, 귀족들도 베토벤을 고용인이 아닌 동급으로 보고 친구처럼 대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그 이유는 베토벤의 이름에 있다.

 

베토벤의 정식 명칭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인데 가운데 van은 귀족에게만 붙이는 칭호이다. 베토벤의 이름은 루트비히이고 성씨가 베토벤이다. 베토벤은 이름이 아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인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독일 귀족은 이름과 성씨 사이에 'von' 이라는 호칭을 붙여 귀족 출신임을 나타냈고, 네덜란드 귀족은 'van'을 붙여 귀족 출신임을 증명하였다. (현재 van은 네덜란드어에서 '~의' 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전치사로 쓰인다.)

 

그 외 나라마다 귀족임을 나타내는 칭호가 있는데 프랑스는 de, 이탈리아는 di 식으로 이름과 성씨 사이에 귀족임을 나타내는 칭호를 붙여 귀족들은 자신들이 평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성씨에 칭호를 붙여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독일 본의 궁정교회에 총괄 음악 지배인으로 스카우트되어 17살의 어린 나이에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인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정착하여 아들 요한을 낳았고 요한은 다시 7남매를 낳았다.

 

(※ 베토벤의 형제는 삼 형제로 알려져 있고 베토벤이 장남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베토벤은 7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일찍 죽었고, 둘째가 베토벤이다. 셋째가 카알, 넷째가 요한이다. 그 이후에 태어난 아들 1명과 딸 2명 모두 일찍 죽는다.)

 

베토벤의 van 이라는 호칭은 많은 독일 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받고 귀족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van이라는 호칭 자체가 귀족들 입장에서는 베토벤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베토벤이 비인으로 이주하고 정식적으로 데뷔하기까지 과정이 귀족들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van과 von은 엄연히 다르다. 다만, 당시 대부분의 귀족들은 van과 von을 베토벤의 악필로 인해 구별하지 못해 베토벤의 안하무인의 행동에도 당연히 친구처럼 받아들였다고 하며, 베토벤도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van 호칭을 더더욱 강조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워낙 악필로 알려진 탓에 귀족들이 van 호칭을 von으로 잘못 읽는 사례가 많아 말년에 처제와 조카 양육권 분쟁에 휩싸였을 당시 담당 변호사의 실수로 귀족 전문 법원에 가서 분쟁했던 사례도 있다고 하며, 법정에서 일반인으로 밝혀져 다시 일반 법정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악필로 인해 탄생한 베토벤의 최고의 명곡이 있는데 바로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피아노 바가텔 독주곡이다. 이 곡은 그의 레슨을 받던 많은 여인 중의 한 명인 테레제 말파티를 위해 작곡한 곡인데, 당연히 원제는 "테레제를 위하여"이다. 베토벤이 워낙 악필이고 베토벤 사후에 출판된 곡이다 보니 테레제를 엘리제로 잘못 읽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제목이다. 

 

베토벤은 귀족들의 후원과 많은 인기를 가지고 있던 작곡가였으며 베토벤은 그를 바탕으로 자신 스스로 귀족과 동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점점 이름이 알려지고 음악이 유명해지고 명성이 높아가지게 되자 스스로 나는 뛰어난 음악가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인사를 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의 풀 네임은 Johann Wolfgang von Goethe로, 괴테 역시 독일 귀족임을 상징하는 von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당당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런 사정을 하는 베토벤이 괴테에게 황후를 보더라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귀족이자 예술인으로서 인사도 받고 대접받으라고 요구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귀족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귀족의 입맞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의 음악을 창조하면서 작곡하는 모습이 후대의 많은 음악가들에게 "음악가=고용인" 이 아닌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존중받게 된 길을 만들어준 당사자가 베토벤이기 때문에 후대 음악가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고전파 양식의 틀을 버리고 베토벤 만의 음악 세계에 들어가면서 낭만파 시대가 열리고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베토벤에게 가장 애착이 있었던 음악은 합창 교향곡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합창 교향곡 이전에 베토벤 스스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곡은 영웅 교향곡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이 때까지의 고전적인 양식을 버리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길에 들어와서 심혈 있게 최초로 작곡한 곡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영웅 교향곡에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 베토벤의 작품번호로도 보듯이 작품번호 55 영웅 교향곡 이전은 고전파 양식에 따른 음악들이 대부분이지만 영웅 교향곡부터 작곡한 곡들은 베토벤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창작적인 곡들이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영웅 교향곡이 낭만파의 길을 열어 놓은 최초의 곡이었기 때문에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에 강한 애착을 가졌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게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음악적인 길을 최초로 시도했던 베토벤의 이런 성향이 후대에 현대인들이 음악가, 예술가들의 인식을 크게 바꿔 놓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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