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연산군의 어머니로 알려진 폐비 윤씨는 투기가 심하고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폐위되었고 후대에서도 나쁜 여자로 인식되고 있는데 정말 그녀가 국모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는지 폐비 윤씨의 입장에서 한번 논해보겠다.
세명의 시어머니를 모시기 힘들었던 폐비 윤씨
결혼하신 여성분들 대부분은 공감하겠지만 시어머니 한 분을 모시는 것도 참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폐비 윤씨 같은 경우에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로도 모자라 명의대비, 자성대왕대비까지 모시느라 항상 숨 막히는 세월을 보냈다.
자성대왕대비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수렴청정한 여인으로 세조가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줄 정도로 여장부의 성격이었다.
명의대비는 예종의 왕비이자 제안대군의 어머니로 제안대군이 임금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평생 가슴에 한을 품었던 여인이다.
마지막으로 인수대비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여인으로 그녀의 성품은 너무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라 악녀로 알려진 문정왕후 못지않게 드센 성격이었다. 문정왕후보다 성격이 묻힌 이유는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권세가 한쪽으로 안 쏠렸기 때문이었고 자성대왕대비가 그 뒤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 자성대왕대비와 같이 있을 때도 그녀의 성품이 위세를 떨 정도였다면 이들이 없었다면 인수대비의 성품은 안 보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세명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셈이 된 폐비는 이름만 중전이고 국모일 뿐 가시방석에 앉는 날이 대부분일 것으로 보인다. 폐비 윤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시어머니로도 모자라 명의대비에 자성대왕대비까지 결국 세명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경우니 너무 힘들뿐더러 벅차네요, 중전이라는 자리도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에요, 또 성격들도 모두 한 성격 하시기 때문에 너무 힘드네요"
성종의 여성 편력으로 인해 가슴 아팠던 폐비 윤씨
성종은 조선 임금 중에서 태종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자녀수와 후궁을 둔 임금으로 12명의 부인에 16남 12녀를 남겼다. 그렇지만 이는 공식적인 기록이고 비공식적인 기록들.. 조졸한 자녀수와 성은만 내리고 후궁 첩지를 내리지 않는 궁녀들을 합치면 그 수치는 훨씬 많아진다. 성종이 38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26년 동안 재위에 있었는데 섭정을 받은 유년시절을 제외하면 성종이 성인이 되어 보위에 있던 해는 19년 정도 된다. 19년 동안 공식적으로 28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대단한 여성 편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죽하면 성종에게는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낮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요순 임금처럼 정사를 돌봤고, 밤엔 중국 하나라의 걸 임금과 은나라의 주 임금처럼 주색잡기에 능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칭에 걸맞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큰 업적을 남긴 반면, 거의 매일 밤 곡연(임금이 궁중 금원(禁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베풀던 소연)을 베풀고 기생들과 어울렸고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28명의 자녀가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
성종이 38세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이유도 특별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여성들과의 지나친 방사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 같은 경우도 순회세자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자 대를 잇기 위해 무수리 장씨와의 지나친 방사로 사망했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이다.
현대 시대에는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운다던지 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는다면 기분 나쁘고 열받고 돌아버리는 것, 즉 질투를 하는 것이 대부분 여자들의 인지상정의 감정이다.
성종의 여성 편력은 대단했다. 폐비 윤씨가 후궁시절로 있을 때에는 윤씨가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왕비가 된 이후로는 어찌 된 일인지 후궁 처소로만 발길을 돌렸다. 왕비가 회임을 하게 되면 합궁을 못한다는 궁궐 내의 법이 있었지만 연산군을 낳은 후에도 성종은 후궁의 처소로만 발길을 돌렸다.
특히 왕실의 강화와 번영을 강조했던 3 대비(자성대왕대비, 명의대비, 인수대비)는 임금이 많은 왕자를 생산해서 왕실을 번창하고 지탱해줘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임금은 많은 후궁을 둬야 한다고 권고했다.
성종의 여성 편력은 대비들의 권유와 맞아떨어져서 왕실의 후손을 번창해야 한다는 핑계하에 성종은 후궁 처소에만 찾기 시작했고 이는 폐비 윤씨의 투기에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정소용, 엄소용의 모함은 그녀를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대비들은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임금이 후궁을 많이 두어 많은 왕자를 두는 것은 당연하다고 국모로서의 체통을 지키라고만 강요할 뿐이었다. 폐비 윤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시어머니를 세분이나 모시는 것도 힘들고 버거운데, 남편에게라도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싶은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아예 내 처소는 들어오지도 않고, 다른 후궁들 처소에만 가니 너무 외롭고, 한 명도 아닌 수많은 후궁들과 살을 섞는다는 생각만 하면 미칠 거 같아요"
내훈만 강조하는 인수대비
내훈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잘 아는 책인데,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 여인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내훈을 지은이는 바로 인수대비인데 주 내용들이 여성들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 내훈에는 어떤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을지 KBS 역사스페셜에서 일부 내용을 공개했는데 다음과 같다.
내훈의 내용만을 보더라도 현대 여성들이 보기에는 수긍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다. 인수대비는 이런 내훈의 내용을 폐비 윤씨에게 읽으라고 하고 내훈을 따르라고 하였다. 위 이미지에는 없지만 내훈의 내용 중에서 "여러 첩을 두어도 투기하지 말라"는 내용은 조선시대 여자들을 두 번 죽이는 제도였다. 조선시대는 일부다처제라 남자가 여러 명의 여성을 후궁이나 첩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성종의 여성 편력 자체는 임금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에 폐비 윤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3명의 대비들은 왕실의 번영을 강조했고, 가끔 남편인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와서 하소연하고 화풀이했을 때에는 아녀자가 그런 거 하나 이해 못 한다고 투기나 한다고 속 좁은 아녀자라고 폐비 윤씨에게 탓을 돌리기 일쑤였다. 폐비 윤씨는 이름만 왕비일뿐 외롭고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폐비 윤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중전은 여자도 사람도 아닌가요? 어떻게 그 내훈을 일일이 다 지키고 살으라는 건지, 정말 남편도 시어머니들도 원망스럽고 후궁들도 모두 미워죽겠어요."
성종은 천하에 없는 효자인가? 아니면 마마보이인가?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기록 그리고 야사를 보더라도 성종은 인수대비를 비롯한 3명의 대비에게 극진한 효성을 다한 임금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성종은 죽을 때까지 모후인 인수대비의 명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인수대비가 하라면 말 그대로 따르는 안 좋은 표현으로 하자면 마마보이 기질이 있었다. 단 한번도 인수대비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따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성종의 마마보이 기질은 일찍 남편인 덕종을 떠나보내고 평생 과부로 자식 둘에게 의지하고 집착해서 살았던 인수대비로부터 비롯되었다. 인수대비는 홀로 3남매를 키우면서 독하면서 강해졌고 남편이 없는 만큼 자식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대단했다. 성종도 이런 어머니의 아픔을 유년시절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던 천하의 효자가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내인 폐비 윤씨의 입장은 달랐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어머니 말만 따르는 남편이 당연히 좋게 보일리가 없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마마보이를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폐비 윤씨 역시 인수대비 치마폭에 있는 성종의 모습이 매우 거슬렸을 것이다.
실제로 윤씨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로 올 때마다 어머니와 대비들의 그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임금다운 임금이 되라고 여러 번 권고했고, 이 말은 3 대비의 귀에 고스란히 전해져 대비들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던 것이고 윤씨가 폐출 되는데 한 역할을 했다. 윤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줏대 없이 어머니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남편을 어느 아내가 가만히 보고 있나요? 당연히 아내인 제 입장에서는 어머니에게 할 말도 하고 자기 의견도 좀 내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더군다나 남편은 이 나라의 군주인데 군주다운 권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편을 아기처럼 감싸고도는 대비들이 너무 이해가 안 가요."
미신을 믿는 중전의 자질을 문제삼은 왕실
폐비윤씨는 성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궁녀 삼월이를 시켜 무당을 찾아가 각종 비술을 전해 듣고 시행에 옮겼지만 그와 관련된 물건들이 발각되자 왕실에서는 국모로서의 자질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서는 미신이나 무속인을 믿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아이 잘 낳는 여자의 속옷을 입는다던지 많은 풍속적인 미신이 따랐고 왕실에서도 사당을 지어 미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소격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미신은 아니었지만 3 대비와 성종이 아버지인 덕종을 위해 조선의 법을 어기고 불교의식인 수륙제를 한 사례도 있었다. 폐비 윤씨의 그런 문제점 하나를 대수롭게 넘어가지 않고 그녀의 국모로서의 자질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3대비와 성종은 조금도 너그러움도 없었다,
그렇다면 폐비 윤씨가 폐비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여러 역사자료를 종합해 보면 폐비 윤씨 성격이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폐비윤씨는 할 말은 하고 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대비가 원했던 국모의 성격은 어른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여인이었던 것에 비해 폐비 윤씨에게는 전혀 거리가 먼 성격이었던 것이다. 투기를 하는 부분도 인내를 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후궁 문제부터 폐비 윤씨는 참지 못하고 3 대비와 충돌을 자주 일으켰다. 요즘 시대로 말하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 시어머니와 논쟁을 하는 셈이다. 폐비 윤씨는 남편인 성종과 3대비와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잦았다. 그리고 정소용처럼 대비들에게 살갑게 굴고 애교도 부리면서 요령껏 처신하는 처세술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권력욕 때문이었다.
자성대왕대비와 인수대비는 권력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성대왕대비는 인수대비의 권력욕을 항상 경계했으며 자성대왕대비도 7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그만둔 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닐 정도로 그녀 역시 권력욕이 있었다. 이들의 권력욕과 한명회의 권력욕까지 더해져 서로 경계하다 보니 한쪽으로 권력이 치우치지 않아 성종대에는 나름대로의 태평성대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중전인 윤씨가 책봉되고 3개월 후에 아들을 낳았다. 정치의 속성이라는 것이 이런 상황이 되면 새로운 중전에게도 권력이 옮겨가는 것이 순리이다.
폐비 윤씨가 아들을 낳자 실제로 조정은 폐비 윤씨를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는 상황으로 반전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조정대신들이 폐비 윤씨에게로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자성대왕대비,인수대비,한명회의 권력을 경계하던 신진 대신들이 그들과 맞서기 위해 윤씨가 아들을 낳자 힘을 실어주었고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권력에 집착하는 인수대비와 자성대왕대비 그리고 한명회 입장에서는 그런 중전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런데 폐비 윤씨는 그런 조정 대신들의 반응에 호응하며 동조했다. 아들을 난 이 기회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고자 싶었고 허울뿐인 중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욕구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예 이 기회에 3 대비의 권력과 맞서고자 했던 것이 그녀의 과욕이자 실수였던 것이다.
세 번째로, 후궁들의 암투였다.
성종은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폐비 윤씨를 가장 투기한 여인이 정소용과 엄소용이었다. 폐비 윤씨가 임신을 하여 왕비가 된 것을 보고 후궁들도 나도 왕자를 낳으면 언제든지 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중전 알기를 우습게 보았다. 특히 정소용, 엄소용의 투기와 모함이 심했다. 후궁들의 투기가 난무하니 중전의 권위와 위신은 땅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싹싹한 성격에 처세술에 능숙한 정소용은 인수대비 앞에서는 요조숙녀도 돌변하니 인수대비는 정소용을 가장 아꼈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정소용을 중전 자리에 앉히고 싶었지만 폐비 윤씨가 먼저 임신하게되어 어쩔 수 없이 윤씨가 중전으로 책봉된 것이었다.
폐비 윤씨의 임신 때문에 중전자리를 오르지 못한 정소용은 엄소용과 함께 폐비 윤씨의 안 좋은 소문을 전달하는 다리역할을 하였고, 3 대비가 폐비윤씨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극도로 이르자 이간질을 하여 윤씨가 폐출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엄소용과 정소용은 죽을 때 당시에도 소용의 품계였다. TV 사극에서는 귀인으로 품계를 높여 방영하는 프로가 난무하는데, 중종반정 이후 중종이 자신의 반정면목으로 귀인으로 추대해서 올려준 것이다. 두 여인의 품계가 죽기 직전까지 소용밖에 안 되었다는 건 출신도 출신이었지만 총애도 많이 받지도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왕비 자질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소용의 경우 안양군과 봉안군을 낳았음에도 소용이라는 낮은 첩지는 총애를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 번째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과실?
폐비 윤씨의 결정적인 폐출원인으로 부부싸움 끝에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어 폐출된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이것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모를 폐출할 때는 반드시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특히 조선시대는 명분을 가장 중요시하던 사회였다. 그런 와중에서 폐비 윤씨를 폐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이 필요했다.
정사기록인 실록에 없다는 점은 의구심을 가져볼 만하다. 오히려 1638년에 나온 '기묘록'이라는 내용에서 손톱자국을 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성종조(成宗朝)에 공혜왕비(恭惠王妃)가 죽은 다음 숙의(淑儀) 윤씨를 올려서 비(妃)로 삼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을 낳아 은총이 융숭하니,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숙원(淑媛: 양가(良家)의 딸이었던 정씨(鄭氏)와 엄씨(嚴氏)를 말한다) 을 투기하였고 임금에게도 불손하였다. 하루는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있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크게 노하여, 천위(天威)를 격동시켰다. 임금이 외정(外庭)에 나가자 대신 윤필상(尹弼商) 등이 영합하여 의논을 올려 윤씨를 폐하여 친정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 외에 연려실기술에도 폐비 윤씨의 손톱자국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영조 때 지어진 책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사인 실록에는 없고 야사로만 전해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묘록은 1638년에 나온 책으로 폐비 윤씨가 죽은 지 무려 156년 후에 나온 책이라 그 당시에 구체적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왕실에서 직접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실록청에서 기록하는 것인데, 실록청에서는 확실한 명분이 있는 내용만 기재하고 원칙 그대로 보고 들은 내용 그대로 기록하는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실록청 내용은 제왕이라도 열람, 수정을 할 수 없으므로 손톱자국 내용을 써도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 3 대비는 물론 성종도 알 수 없는 부분이라 기록을 해도 무방 할 텐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없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폐비 윤씨의 폐출사유에 대해 "지나친 투기"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나친 투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폐출한 것도 모자라 사사까지 한 이유는 누가 봐도 납득하기 힘들다. 왕실에서 대놓고 밝힐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한마디도 안 지고 대들고 비유를 맞추지 못해서라고 죽였다고 대놓고 적지 못해서 지나친 투기라고 대충 적어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았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또한 3 대비는 지나치게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착했었고, 성종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 정도였다. 성종이 허수아비까지 안된 이유도 자성대왕대비, 인수대비, 인혜대비, 한명회가 서로의 권력 유지를 위해 서로 주고받고 대립했기 때문에 그나마 성종의 임금다운 치세가 가능한 것이다.
결국 그에 합당한 사유를 찾기 위해 손톱자국 사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손톱자국 사건은 그녀의 평상시 성품으로 인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과 아니면 그 당시 폐비 윤 씨의 폐출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적절한 명분을 찾기 위해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대비들이 자신들의 권력에 맞서고자 한 폐비를 제거하기 위한 차선책일 수도 있다. 원래 권력 앞에서는 자식, 형제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윤씨를 제거한 후에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중전을 다시 세울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비록 엄격한 3 대비와 성종의 바람기가 있더라도 조선사회가 순종적인 여성을 원했던 사회였었고 폐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들인 연산군이 보위에 오를 때까지 몸을 낮추고 숨죽이고 현명하게 참고 지냈다면 말년에 가서 문정왕후처럼 한을 풀듯이 섭정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여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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