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장희빈은 정말 희대의 악녀인가? 역사기록으로 본 실제 모습!

patrica1977 2024. 1. 1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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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URL 추가 ]

 

조선의 3대 요녀" 중에서 3명을 꼽으라면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장희빈이 들어간다는 데에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장희빈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와 이미지에는 이미 완전히 악녀 이미지로 자리 잡힌 여인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이 악녀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해보거나 겪어본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단지 동화책, 소설,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선생님들도 악녀라고 가르쳐주었기에 어느덧 장희빈은 들어보지 않고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되는 뻔한 악녀이기 때문에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이 악녀라고 단정지을 만한 물증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 동영상으로 보았듯이 그녀가 악행을 저지를 만한 기록이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있다면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다는 것인데, 지구상에서 어느 여자치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경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인지상정이다. 여자들이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지 장희빈의 성품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 남자를 위해 다른 여자에게 웃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되묻고 싶다.

 

반대로 한 여자를 두고 두세남자가 경쟁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이 남자들 역시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서로 결투한다던지 서로 시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후궁들의 질투와 모함들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장희빈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악행들은 모두 정사가 아니라 야사인 '수문록'이라는 책에서 전해지는 내용인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수문록을 만든 것이 서인세력이고 서인사람인 이문정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아래 링크 참고하면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8834&cid=46622&categoryId=46622

 

수문록

조선후기 문신 이문정이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연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역사서. [내용] 이문정의 호가 농수(農叟)이므로 『농수수문록(農叟隨聞錄)』이라고도 한다. 3권 3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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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링크를 읽어보면 마지막 줄에 "불편부당하게 충역(忠逆)을 구분하여 듣고 본 것을 기록한다고 하였으나 노론 4 대신의 변호에 역점을 두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노론세력의 입장 위주로 적었다는 것이다. 노론은 서인의 한 갈래인데 서인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 세력이다.

 

현재 대한민국도 민주당, 새누리당 등등 많은 당들이 있는 것처럼 조선에는 선조시대 때부터 대신들이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하고 있었다.

 

숙종시대에는 조정대신들이 서인, 남인으로 나뉘어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를 모함하고 죽이는 당파싸움이 난무했다. 숙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3번의 환국을 단행했을 정도로 숙종시대의 당파싸움은 매우 심한 시기였다.

 

서인의 가장 높은 영수는 인현왕후 민씨 였고, 남인의 가장 높은 영수는 장희빈이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싸움을 부추긴 것은 여인들의 단순한 싸움이라기보다는 남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봐야 정확하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서인, 남인 편에 들고 싶어서 들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인현왕후는 아버지인 민유중이 서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인 사람이 된 것이었고, 장희빈은 궁녀시절 자의대왕대비전의 침방나인으로 배찰되어 있었는데 자의대왕대비가 남인사람이었다.

 

당시 자의대왕대비 조씨는 남인세력의 가장 높은 어른이었고 숙종의 어머니 헌렬왕대비 김씨는 서인 사람의 가장 높은 어른이었는데 이들은 서로 당파가 다른 이유만으로 서로 사이가 안 좋았고 항상 대립했다.

 

자의대왕대비 조씨는 자신의 처소에 있던 보기 드문 미색의 궁녀 장씨를 이용하여 숙종에게 접근하여 계획적인 성은을 입힐 계획을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모의했고, 궁녀 장씨를 이용하여 숙종이 남인사람을 등용하게끔 치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모든 궁녀들의 꿈이 무엇인가? 임금님의 승은을 얻어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는 것이 꿈이었다. 그렇지만 궁녀 수만에도 500~700명 정도가 되니 임금에 눈에 띄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씨 역시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의대왕대비가 알아서 숙종을 만나서 해주겠다는데 이런 대왕대비의 청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궁녀 장씨는 대왕대비의 중재로 쉽게 숙종을 만났고 숙종 역시 그녀의 빼어난 외모에 마음을 빼앗겼다.

장씨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최고의 미인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보기드문 외모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 성공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왕대비의 도움으로 쉽게 숙종의 성은을 입게 된 장씨는 자연스럽게 남인의 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씨는 남인이 좋아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임금의 승은을 얻기 위해서 남인이 된 것이었다. 또한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대왕대비의 조카)의 몸종이었기 때문에 남인과 엮여있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중에 들어온 숙빈 최씨 역시 인현왕후 전의 무수리였으므로, 그녀를 섬기고 따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 역시 서인사람이 된 것이었다. 서인은 항상 남인은 견제하였고 남인 역시 서인을 견제하고 모함하고 비방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임금의 사랑을 나눠가져서 안 좋은 관계에 있는 인현왕후, 숙빈 최씨, 희빈 장씨가 당파까지 다르니 서로에 대한 경계심은 극도에 이르었다.

 

오랜 당파싸움 끝에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되었고, 남인은 갑술환국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최종적으로 패한 남인이 역적이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장희빈도 악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서인으로 구성된 조정대신이라는 작자들이 또다시 패가 갈려 험담과 시기가 난무하기 시작했고, 결국 인원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세력과 장희빈 아들인 경종을 중심으로 한 소론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결국 노론세력의 이문정이라는 사람이 수문록이라는 책을 만들면서 장희빈에 대한 근거 없는 내용을 많이 집어넣은 것이다.

 

그렇지만 위에 올린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에도 봤듯이 증거 없는 객관성이 떨어지는 내용들이 대다수이다. 수문록에 기재된 내용 중에서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첫 번째로, 장희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고 용종을 잉태한 무수리 신분의 최씨를 문초하고 숙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독으로 가뒀다는 내용이 수문록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숙빈이 무수리에서 숙원의 첩지를 받은 날자는 1692년 4월 26일이고 1693년 10월 6일에 첫째 아들인 영수를 낳는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 13일에 사망한다.

 

[조선왕조 실록 1693년 4월 26일 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04026_002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4월 26일 기해 2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최씨를 숙원으로 삼도록 명하다

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 실록 1693년 10월 6일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10006_002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10월 6일 병자 2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숙원 최씨가 왕자를 낳다

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 실록 1693년 12월 13일 자 내용]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912013_001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12월 13일 임오 1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새로 태어난 왕자가 졸하니, 예장을 거행하지 말도록 명하다

sillok.history.go.kr

 

아무리 첩지를 받지 못했더라도 임금의 용종을 잉태한 여인을 추궁하고 문초한다는 것은 국모의 자질을 걸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 장씨가 이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최씨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문록은 누가 보더라도 희빈 장씨를 깎아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지은 글이라고 볼 수 밖에는 없다. 대부분 소설에는 이것을 사실인 것처럼 기록해 두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수문록이나 인현왕후전을 보면 장희빈은 못돼서 폐비시켰고 인현왕후는 어질고 착해서 복위시켰다고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당파싸움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인이 세력이 커지면 왕권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환국을 일으켜 서인세력을 꺾고 남인을 등용했고, 반대로 남인의 세력이 커지면 또다시 고의적으로 환국을 일으켜 서인을 등용했는데, 이를 미화시켜서 장희빈이 못돼서 폐위시켰고 인현왕후는 착해서 복위했다고 완전히 서인입장에서 기록된 책이 수문록이나 인현왕후전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일기라는 행정 사무를 기록한 책이 있는데, 이 기록은 정사, 즉 사실만 기재되어 있고 실제로 숙종이 고의적으로 환국을 단행했다는 내용이 모두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가 어떤 책인지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097&cid=46622&categoryId=46622

 

승정원일기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왕명의 출납·제반 행정사무·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지. 관청일기. [내용] 3,245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현재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의 기록이 남아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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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있던 5년 동안에는 대왕대비, 대비도 모두 죽고 아무도 없었고, 숙종이 들인 후궁들도 숙빈 최씨 외에는 모두 장희빈이 왕비에서 후궁으로 강등된 후에 들인 후궁들이라 장희빈이 중전으로 있던 5년 동안은 후궁들과 만날 일이 없어 질투했다는 실덕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 후에 다시 당쟁에 휘말려 장씨는 빈으로 강등된다.

 

숙빈 최씨 같은 경우에는 장희빈이 중전으로 있었을 때 숙종의 후궁이 되었는데, 무수리인 최씨가 후궁이 된 것은 장희빈이 내린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후궁을 맞아들이려면 반드시 왕비의 재가를 받아야 하고 후궁의 교지를 내리는 것은 왕비이지 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 마음대로 후궁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MBC에서 방영된 사극 "대장금"에서 문정왕후 역의 박정숙 씨가 장금역의 이영애에게 후궁이 되라고 후궁의 교지를 작성하여 준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다. 기억 안 나면 다시 보기로 확인해 보면 된다. 이게 원칙이라는 것이다. 후궁은 중전의 교지로 결정되는 것이지 임금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수리 최씨가 후궁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당시 왕비였던 장희빈의 교지가 있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씨는 장희빈과 사이가 안 좋았고 심지어는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한다고 고변까지 한다. 장희빈 입장에서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비록 장희빈이 최씨에게 후궁의 교지를 내렸지만 장희빈 역시 그녀도 여자였고 천한 출신의 최씨에게 후궁의 첩지를 내린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됐겠지만 그래도 결국 고민을 하다 그녀에게 후궁의 첩지를 내린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법과 정사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통해 정확한 기록을 재확인해보면 장희빈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 역사학자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장희빈을 다룬 사극들은 작가들이 모두 이런 역사적 지식에 없다 보니 더 알려진 수문록이나 인현왕후 전을 근거로 내용을 만들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극을 본 시청자들은 정사기록을 확인하지도 않고 못된 년이구나, 나쁜 여자네 식으로 인식되어 장희빈이 악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굳이 장희빈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람에게 한번 안 좋은 인식을 가지게 되면 그 인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습성 중의 하나가 A, B, 가 서로 친구인데 어떤 일로 서로 싸우고 나서 A가 제삼자인 C라는 사람에게 B라는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할 때 C라는 사람은 B를 알기도 전에 그를 B말만 듣고 나쁜 사람으로 단정해버린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B를 만나 그 사람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데, 어차피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만날 수도 없겠지만, 만약에 C가 B를 아는 사이인 경우에도 B에게 확인을 해보지도 않고 A말만 듣고 B가 잘못됐고 나쁜 사람이다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부부관계이건 친구관계이건 동료관계이건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반드시 양 당사자들의 입장을 모두 들어보고 판단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 중에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장희빈이야 죽어서 할 말이 없으니 그러면 정사기록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인데 확인도 해보지도 않고 이미 악녀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필자인 나도 이런 식으로 누구에게 어이없는 모함을 당한 적이 있다. 모함을 당한 것도 내가 남을 도와주려고 한 행동을 잘못 알고 오해가 생겨 나를 모함한 것인데, 내 모함을 들은 사람은 사실확인도 안 해보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모함한 사람도 문제였지만 솔직히 나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확인도 해보지도 않고 모함한 사람 말만 듣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한 그 사람에게 더 실망해서 사실확인도 제대로 안해보고 행동하는 것에 더 실망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교제를 끊었다.

 

특히 역사인물을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입으로만 전해지는 내용과 드라마로만 의존하지 말고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 조정 사정, 사회, 정사 기록들을 반드시 읽어보고 판단해야 해당 인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나온다.

 

최근에는 장희빈뿐만 아니라 광해군, 문정왕후, 폐비 윤씨 등 이들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도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관점은 매우 주관적이고 또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반드시 객관적으로 알아봐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로 인현왕후과 희빈 장씨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는 동영상 몇 개를 공유한다.

 

[참고 동영상 1]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의 본모습

http://naver.me/FrAaaKk7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의 실체.mp4

패트릭님이 공유한 동영상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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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동영상 2] 조선 경제 부흥에 앞장선 숙종과 희빈 장씨

http://naver.me/FgSkkwHl

 

조선 경제의 부흥에 앞장선 숙종과 장희빈.mp4

패트릭님이 공유한 동영상을 확인하세요.

my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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