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여왕 "제인 그레이"는 재위기간이 적어 영국 역사에 가려져 있는 인물로서,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제인 그레이에 대한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튜더왕조는 엘리자베스 1세가 자녀를 낳지 않게 되어 끝나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 튜더왕가 중에서 단 9일 동안 재위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 제인 그레이 여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드워드 6세 사망 후에 바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 제인 그레이입니다. 제인 그레이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사연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제인 그레이는 1537년 레스터셔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확한 출생일자는 전해지지 않으나, 에드워드 6세와 생일이 같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도셋(Dorset) 후작 헨리 그레이(Henry Grey), 어머니는 헨리 8세의 생질녀, 레이디 프란세스 브랜던 (Lady Frances Brandon) 입니다. 헨리 7세의 증손녀이기도 합니다. 후작 부부는 사냥과 파티를 즐기는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제인은 그와 정반대로 학구적이고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프랜시스 브랜든은 딸의 나약함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자주 체벌을 가하고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제인은 대신 공부와 독서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그녀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구사했고,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받은 독실한 성공회신자로서 신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1546년 제인은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였던 캐서린 파아의 저택에서 살게 됩니다. 캐서린 파아는 모성애가 강한 여성으로, 제인과 엘리자베스(후일 엘리자베스 1세)에게 애정을 쏟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합니다. 그러나 1548년, 헨리8세가 죽은 후 토머스 시무어와 3번째 재혼을 하였고, 파아는 시무어의 첫 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숨을 거두면서 제인의 안락했던 생활도 끝이 납니다. 제인은 캐서린 파의 장례식에서 주 애도자 (chief mourner)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동화 "왕자와 거지"의 실존 모델이기도 한 에드워드 6세 재위시절, 재위 6년 내내 병약하여 재위도중에 후계자를 미리 결정해두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에드워드 6세는 자녀도 두지 않아 그가 죽은 후 실질적인 1순위 왕의 후보자는 그의 큰누나이자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 공주였습니다. 메리 공주는 헨리8세의 첫째 부인 캐더린(스페인 공주)의 딸이었는데, 헨리 8세가 둘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을 버리고 신교로 개종하면서 메리는 어머니인 캐더린과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불우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참고로 첫째 부인인 캐더린은 헨리8세의 형의 부인이었습니다. 친형이 결혼 후 일찍 죽자 헨리 8세가 보위를 물려받게 되었으며 그 당시 유럽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의 친선관계를 위해 영국 대신들은 헨리8세를 설득하여 형수인 캐더린과의 마음에 없는 결혼을 요구하였고, 결국 헨리 8세도 마음에 없는 결혼에 수락했던 것입니다. 이 결혼이 결국 헨리 8세가 2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 구실을 제공하는 셈입니다.)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메리 공주가 왕위에 오르면 신교로 개종한 영국이 가톨릭 국가인 메리의 지배를 받아 큰 피바람이 예고됨에 따라, 대부분 영국 대신들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당시의 실권자였던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 공작인 존 더들리(John Dudley)의 추대를 받아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근거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한 모계혈통 때문이고 헨리 7세의 증손녀라는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후작 부부는 에드워드6세 재위시절에 토머스 시무어의 도움을 통해 제인을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시무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자 계획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그레이 가문은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으나, 프랜시스 브랜든은 딸을 왕비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553년, 제인은 노섬버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의 아들 길포드(Guilford)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인 자신은 결혼을 격렬히 거부했지만 부모의 강압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힘을 얻었던 노섬버랜드 공작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으면 로마 가톨릭 신자인 왕녀 메리 1세를 누르고 성공회 신자인 제인을 왕위에 올릴 심산이었습니다. 노섬버랜드 공작은 이렇게 튜더 집안과 자기 집안을 혼인결연시켰고, 에드워드 6세를 움직여 자기 며느리가 된 제인 그레이에게 양위하겠다는 유언장에 서명하도록 요구했습니다.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제인 그레이는 7월 10일에 영국의 여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스페인 본국으로 전달되어 스페인에서는 메리공주를 추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영국으로의 대대적인 출병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영국의 민심도 불행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메리 공주에게 기울어 있었습니다. 제인이 즉위한 지 겨우 9일 후인 7월 19일 메리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스페인의 군대와 함께 런던에 입성하자, 그레이 후작부부는 딸 제인을 내버려 두고 런던에서 도망쳤습니다. 제인과 길포드 더들리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노섬버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8월 21일 처형당합니다.
비록 제인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메리 1세는 제인의 목숨을 특별히 살려줄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554년 1월, 토머스 와이어트를 중심으로 성공회 신자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가담하면서 성공회교도 왕위계승권자인 제인은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리 1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제안하였지만, 제인이 이를 거절하게 되어 제인과 길포드의 참수가 결정되었습니다. 메리 1세는 사형식 날, 런던탑에서 하녀들에게 그녀의 임신 여부를 알아보게 하는데 그녀가 임신이 아닌 것이 확인되었고, 결국 1554년 2월 12일 제인과 그녀의 남편 길포드 더들리는 런던탑에서 참수되습니다.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도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가담한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제인의 어머니 레이디 브랜던은 딸의 죽음을 막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 헨리가 죽은 지 겨우 3주 만에 자신의 시종 아드리안 스토크와 결혼했고, 메리여왕의 사면을 받아 왕궁에도 다시 출입하게 되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영국 세력들의 우려대로 메리1세로 왕위에 오른 메리는 신교를 금지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처단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수많은 영국 국민들을 죽여 결국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화병에 걸려 재위 3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녀를 1000일의 여왕이라고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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