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김개시는 정말 못생겼고 광해군과 연인관계였을까?

patrica1977 2024. 1. 1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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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광해군일기 + KBS2TV 역사스페셜 ]

 

조선의 3대 요녀로 알려진 김개시는 광해군의 실질적인 오른팔 역할을 한 인물로 대북파과 조력하여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정사인 <광해군일기>에서 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 광해군 5년 8월 11일자(1613.9.24)

'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남의 외모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외모를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개시의 경우는 외모가 하도 '특별'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그 점을 사료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었기에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그의 외모를 평한 것이다. 그럼, 김개시는 '고운 마음'으로 광해군의 관심을 끌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위의 <광해군일기>에서 부분적으로 소개됐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라는 이유 때문에 광해군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광해군일기>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지라, 이 책에서는 광해군 쪽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쁘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이치라는 것이다.

정적의 외모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정적의 인간성만큼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외모의 비중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에 비해 인간성이 매우 중시됐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패자의 인간성만큼은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표현은 승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므로, 이것은 중립적 관점에서 수정해야 한다. 이 표현은 '영리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했다'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가 피지 않았다"는 내용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성격도 부정적으로 묘사한 만큼 외모도 부정적으로 기록에 남길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심성이 착하면 얼굴도 이뻐 보이는 것이고, 얼굴이 아무리 이뻐도 성품이 안 좋으면 볼수록 못나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그렇고 많은 일반인들이 알면서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김개시는 선조대왕의 승은을 입은 '승은상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김개시는 나인 시절 선조대왕의 승은을 입어 승은상궁이 되었다는 점이다. 승은을 입어 상궁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외모가 최소한 못생긴 얼굴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선조대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못생긴 여자에게 승은을 내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마다 외모를 보는 기준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선조는 오히려 눈이 높았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을 수가 없다.

궁궐에는 무려 500~700명의 여인이 궁녀로 배찰되어 있고 이들 궁녀들의 소원은 임금의 성은을 입어 후궁의 첩지를 받고 왕자를 출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궁녀는 임금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을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수백 명의 궁녀 중에서 김개시가 선조의 선택을 받아 승은을 입어 승은상궁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외모가 어느 정도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도 남을 것이다. 특히 그녀의 집안의 권세가도 아니었기에 선조가 예의로 성은을 내릴 일도 이유도 전혀 없었다.

또한 선조는 조선의 역대 제왕들 못지않게 많은 후궁들과 자녀를 둔 임금인데 많은 여인들을 상대한 만큼 웬만한 미색의 여인을 판단하는 눈은 충분히 가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서도 그녀의 성격을 미화화여 부정적으로 기재한 만큼, 그녀가 승은상궁 출신이라는 점을 봤을 때 최소한 중 상급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계축일기'에서는 선조가 김개시에게 성은을 내린 후 佳姬(가희)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아름다운 계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 김개시의 외모는 임금이 직접 따로 이름을 내세울 정도로 어느 정도 미색을 갖춘 여인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에서는 김개시와 광해군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설정하는 경우도 많고 김개시가 왜 광해군의 후궁이 안되었는지에 대한 언급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연인사이도 아니었고 연인관계도 될 수가 없는 사이였다.

 

김개시는 이미 선조의 승은을 입어 승은상궁의 첩지를 받은 여인이라 광해군과는 조선의 법으로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사 두 사람이 사랑했다고 쳐도 절대로 후궁이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개시의 실제나이는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지만 많은 역사자료를 볼 때 광해군보다 10년 정도나 아니면 그 이상 차이 나는 것으로 역사학자들도 파악하고 있다. 요즘 현대사회라면 몰라도 조선시대에서 여자가 이 정도 나이가 차이가 있다면 실질적으로 연인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런 조선시대의 현실에서 본다면 장녹수와 연산군의 관계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장녹수에 대해서는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3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6살로 보일 정도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외모는 별로였으나 언변이 뛰어나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김개시는 승은상궁이 된 후에 동궁으로 옮겨져 어린 광해군을 돌보게 되는데, 이는 공빈 김씨 사후 선조가 김개시를 통해 홀로 남겨진 광해군을 아들처럼 잘 보살피라는 의미가 내재되어있을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은 비록 낮은 직책이었지만 김개시를 지어머니, 누나처럼 믿고 따랐으며 이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시각은 연인관계라기보다는 어머니(또는 누나)와 자식으로서의 시각으로 서로를 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김개시가 선조의 승은을 입은 승은상궁임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아닌 광해군을 선택하여 후일을 도모한 사유를 추측해 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 같은 큰 전쟁을 치르던 시기인 것도 그렇고 이미 인빈 김씨를 비롯한 많은 후궁이 있어 자신의 야심을 펼칠 기회가 없어 선조대신 광해군을 선택하여 자신의 야심을 숨기고 어린 광해군에게 접근하여 마음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조선시대 궁녀 중에서는 역대 임금들에게 하루 밤의 성은을 입은 후 버려지는 궁녀들이 많았다. 이들은 승은상궁으로 곧바로 상궁의 직첩을 받지만 승은 상궁은 승은을 입은 몸이라고 하여 별도의 보직이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승은 상궁까지만 오른 상궁들은 보직도 잃고 임금에게도 버림받는 궁궐 내에서는 아무 할 일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신세였다. 김개시는 이런 승은 상궁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이 같은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광해군을 타깃으로 삼아 의도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또한 선조는 이미 나이가 있어 그가 죽게 되면 자신의 야심을 펼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광해군을 택할 수도 있다

김개시는 임금인 광해군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광해군보다는 어리지만 법도상 광해군의 어머니가 되는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것도 모자라 후궁으로 강등시키는 데에도 일조한 것이 바로 김개시였다. 따라서, 아무리 그녀 자신이 승은상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마음만 먹었다면 장녹수의 사례처럼 광해군의 여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후궁이 되면 공식적인 내명부의 일원이 되어 보는 눈이 많아 정사를 마음대로 도모할 수가 없던데 비해 상궁은 어명을 빙자하여 궁궐 밖으로의 외출이 자유로워 대북파 및 조정대신을 만나는데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공식 후궁이 된다면 아무래도 잦은 궁궐 출입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임금 뒤에서 실권을 잡아 조종했다는 의미이다. 현대의 최순실씨 처럼 말이다.. 그래서 최순실씨를 현대의 김개시로 묘사하고 있는 뉴스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후궁이 되었다면 자신의 존재를 노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후궁이 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광해군과의 '사랑'이 아닌 바로 '권력'이었다. 자식처럼 돌봐주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실질적인 오른팔 역할을 하였고 광해군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다. 김개시는 이런 광해군을 이용해 권력을 키웠고 매관매직을 삼았다, 광해군일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조야집요>에는 광해군이 16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김개시가 광해군이 어느 후궁과 잠자리를 들지 직접 정해주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김개시 본인이 광해군의 승은을 입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해군의 잠자리를 같이 할 후궁을 직접 정해주었다는 것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행동과 같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위치를 짐작하게 해주는 내용이다.

자주 궁궐을 들락거리던 김개시는 반정의 조짐을 가장 먼저 알았는데, 반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광해군을 배신하고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고 결탁하였다. 김자점에게는 반정 후에도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보장받기를 약속받았다. 실제로 여러 대신들이 반정의 조짐이 있다고 꾸준히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김개시는 이 상소를 모두 내치고 김자점이 충신이라고 고한다. 광해군일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김개시와 김자점이 결탁한 내용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김자점이 충신이라고 거짓고변한 내용

 

김개시와 광해군은 어머니와 자식 같은 관계이면서 정치적인 협력자, 동조자라는 관계로 인연을 시작하여 광해군을 보호하면서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김개시도 광해군을 기반으로 권력을 갖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효심(?) 같은 마음을 이용하여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러 점점 권력에 맛 들였다. 결국 자신의 권력의 안위를 위해 광해군에게 반정을 고하지 않고 오히려 김자점과 결탁하여 훗날을 약속받았지만, 김자점은 반정후 김개시와의 약속을 깨고 오히려 김개시를 처형해 버린다. 김개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김개시가 정업원(淨業院)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민가에 숨어 있었는데, 군인이 찾아내어 베었다." - 광해궁일기 15년 3월 13일 자

결국 김개시가 못생겼다는 근거는 기록을 뒤져보면 신빙성이 떨어지고 광해군과 연인이었다기보다는 조력자, 동지자, 모자 같은 관계로 협력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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