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독일이 동독, 서독으로 분열되었던 이유

patrica1977 2024. 1. 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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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접 작성 + 이미지 인터넷 검색 ]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독일은 왜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일으켰고 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졌을까? 물론 지금은 다시 통일되어 한 나라가 되었지만 왜 그렇게 나뉘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독일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배운 적이 있지만 다시한번 서술해본다.

 

로마제국의 평화시대(Pax Romana)가 300년 동안 지속된 후에 로마는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그 당시 유럽 북쪽지방에 골고루 퍼져 살았던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침략을 받아 이를 피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를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라고 한다.

 

결국 게르만족으로 가득 찬 서로마제국은 476년 오도아케르 장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에는 여러 개의 게르만 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그중에서 갈리아 지방(현재 프랑스)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프랑크족이 소수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481년에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프링크 왕국은 세력을 키워 갈리아지방을 통일하고 주변 게르만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샤를르마뉴 대제에 이루어서는 유럽에 큰 영토를 자랑할 정도로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프랑크왕국의 최대 영토

 

그렇지만 샤를르마뉴가 죽자 그의 손자 3명이 영토분쟁을 시작하여 결국 프랑크 왕국은 3개 나라로 분열되는데 장남인 로레르 1세는 중프랑크왕국의 왕이 되었고, 둘째인 샤를은 서프랑크왕국의 왕으로 셋째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의 왕이 된다. 이를 베르됭 조약이라고 하며 이때가 843년이다.

 

프랑크왕국의 1차 분열

 

855년에는 베르됭 조약의 주역인 로테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중프랑크 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서 다시 한번 분할되었다. 855년 맺어진 프륌 조약에서 첫째인 루도비쿠스 2세는 남쪽의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을, 둘째인 로타리우스 2세는 북쪽의 로타링기아 지역을, 셋째인 카롤루스는 현재의 프로방스 지역을 차지했다.

 

중프랑크왕국의 분할

 

이 세 형제 중 막내였던 카롤루스가 863년에 사망하면서 그가 다스리던 프로방스 지역은 맏이로서 명목상 황제직위를 유지하던 북부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2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869년 로타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서로가 로타링기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결국 870년 8월 루트비히 2세의 제안으로 양자는 로타링기아를 분할해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 메르센 조약을 통해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모젤 강을 중심으로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특히 이 메르센 조약에 의해 설정된 경계선은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라는 세 지역 경계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메르센 조약으로 인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생성

 

서프랑크는 후에 카페 왕조가 열리면서 국호를 프랑스로 변경하면서 오늘날의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다.(프랑스의 화폐단위 프랑은 프랑크왕국에서 유래되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중프랑크와 동프랑크는 계속 분열로 이어지는데, 그 당시에는 봉건주의제도가 있었는데 영주의 세력이 강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도 영주의 영토에는 간섭할 명분이 없었다. 프랑스도 처음에는 중프랑크와 동프랑크처럼 지방마다 영주들의 세력이 막강하여 별 힘을 쓰지 못하였지만 영국과의 100년 전쟁(1337~1453)으로 인하여 왕은 막강한 군대를 지속적으로 거느리게 되고 영주들 세력이 약화되어 프랑스는 왕권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설립하기에 이르어 강력한 통일국가가 되었다.

프랑스는 강력한 왕권 중심으로 한 왕권신수설의 근본이 된 유럽 최초의 국가였으며, 강력한 중앙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을 1000년 동안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2017년에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지방색이 강한 스페인은 가능한 일이지만, 지방색의 약한 프랑스의 경우에는 워낙 중앙정부의 힘이 강하다 보니 스페인 같은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루이 14세 당시의 프랑스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였다. 루이 14세가 실제로 한 말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루이 14세의 왕권은 절대왕정을 자랑할 시기였다.

 

이렇게 프랑스는 중앙집권체계가 설립되어 분열 없이 강력한 국력을 유지하는데 비해, 왕이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 중프랑크와 동프랑크는 대영주들이 세력을 키우고 전쟁을 계속 함으로 인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결국 중프랑크와 동프랑크 왕국은 수백여 개의 영주국으로 분열되어 국력이 분산되기에 이르었고, 각각 1870년 이탈리아, 1871년 도이칠란트로 통일되기에 이르기까지 1000년 동안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프랑스와 주변 국가들로부터 자주 침략을 당하는 등 삼류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동프랑크 왕국의 경우 루트비히의 왕조가 끊기자 대영주들의 투표로 왕을 선발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두 번째 왕이었던 오토는 크리스트교를 크게 부흥하고 대외적으로 업적을 크게 남김으로써 로마교황인 요하네스 12세로부터 로마황제를 관을 받게 되어 동프랑크왕국은 신성로마제국으로 국호가 바뀌었으며 오토황제는 오토대제(오토 1세)가 된다. 신성로마제국이 된 동프랑크왕국을 "독일 제1제국"으로도 불린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명은 처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고 1157년 제국의 탄생 당시에는 "신성제국"으로 부르다 1512년 퀠른 의회에서 "독일 국민의 신성로마제국"으로 반포하면서 이때부터 신성로마제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토대제 사후에 오른 황제들은 크리스트교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관심만 쏟았으며 정치, 경제에는 담을 쌓고 사는데 그 사이 대영주들이 세력을 키워 서로 치고받는 치열한 전쟁을 하기에 이르었고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300~1000여 개의 작은 영주들의 공국으로 분열되고 만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중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된다)

 

[ 참고자료 : 신성로마제국 시대별 영토 변화 ]

 

http://blog.naver.com/sten1/10052298287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의 영토 변화

▲962년, 대왕 오토가 서로마 황제로 임명됬을 당시의 지도. 후일 교황령이 되는 이탈리아 중부에 까지 도...

blog.naver.com

 

나라가 분열된다는 것은 나라의 힘이 분산되어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수백 개의 국가로 나눠진 탓에 약소국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룩한 프랑스에게 툭하면 얻어터지는 수모를 수백 년 동안 겪었고, 30년 종교전쟁까지 치르는 동안 독일의 국력은 더 약해지게 되었다.

 

잠시 30년 종교전쟁에 대해 언급해 보자. 30년 전쟁은 유럽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쟁인데 유럽의 첫 공식적인 종교전쟁이자 최초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전쟁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구교(가톨릭교)와 신교(프로테스탄트, 반 크리스트교) 간의 싸움인데 지금의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싸움으로 시작되었지만 곧이어 전 독일지역으로 번지게 되었고 신교와 구료를 지원하기 위해 주변국들이 참전하여 점차 국제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스페인, 헝가리가 구교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고 신교를 지원하기 위해 덴마크, 사보이공국,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이 점차 참여하여 독일 지역 전체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페스트까지 퍼져 사망자는 더더욱 속출된다. 결국, 이 전쟁으로 인하여 전 독일은 인구의 1/3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희생된 신성로마제국 인구 환산수치 : 1000만 명)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 30년 전쟁 중 구교, 신교지역 대립도 ]

독일지역내 구교와 신교 대립지역
유럽국가들과의 전투로 인한 저렴된 독일 영토

 

[30년 전쟁 이후 제국 내 인구 사망 비율]

갈색지역 : 인구의 66%가 사망한 지역

주황색지역 : 인구의 33%가 시망 한 지역

노란색지역 : 인구의 33% 미만이 사망한 지역

 

독일지역내 인구사망 비율

 

베스트발렌조약은 프랑스의 재상인 리슐리에와 그의 뒤를 이은 마자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베스트발렌 계약내용은 독일을 조각 내고 국력을 분산시켜 프랑스에 위협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30년 전쟁은 비록 무승부로 끝났지만 영국, 프랑스가 가담한 신교파에게 많은 이득이 돌아갔는데, 프랑스는 구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적대국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신교 편을 들어 30년 전쟁에 참가하여 승전국이 되었고, 그 대가로 프랑스와 경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알자스 지방을 차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최강자로 오르게 된다.

 

300개의 나라로 분열되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신성로마제국 영토에서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정식 국가로 인정받게 되어 독립하게 된다.

[ 30년 전쟁 이후의 신성로마제국 영토 및 당시 유럽지도]

30년 전쟁 이후 유럽 지도

 

그 후 신성로마제국 내의 프로이센 공국과 합스부르크 공국이 서서히 세력을 키우게 되어 주변 공국들을 정복하여 두 나라는 프로이센왕국(프러시아)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처음부터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작하게 된다. 합스부르크는 처음부터 왕가는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300여 개의 나라로 갈려졌을 때 그중에 속했던 대영주 중의 하나였다. 합스부르크는 슈바벤지방(현재의 스위스 북부)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남독일로 세력을 확대하여 주변 영주들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확장]

 

합스부르크왕가의 영토 변화

 

※ 오스트리아 국명은 1805년 8월에 합스부르크왕가에서 정식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여 국명을 정한 것이므로 그 이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대부분 역사교과에서는 이 부분이 잘못 안내되어 있어 참고하세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게르만족들의 전통대로 대영주들의 투표로 선정되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황제를 선정하는 문제에도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게 되었고, 추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독점하면서부터 300개의 연방국가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쟁으로서는 재미를 별로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결혼동맹으로 인하여 많은 영토를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략결혼으로 인하여 낳은 자녀가 그 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합스부르크왕가는 영토를 계속 늘려나갔다.

특히 카를 5세는 정략결혼의 최대 수혜자로, 물려받은 영토만 하더라도 너무 광대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대 영토는 이때 형성되었다. 너무 광대한 영토를 혼자 다스리기 너무 힘들어 나중에 자녀와 형제들에게 영토를 분산해 주기에 이르렀다.

[ 카를 5세 당시의 합스부르크 왕가 최대 영토 ]

(노란색을 제외한 모든 영토가 합스부르크 왕가 영토로 보면 됨)

합스부르크왕가 유럽 내 최다 지배영역

 

당시 아메리카 대륙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으니 카를 5세가 물려받은 영토만 봐도 혼자서 다스리기 얼마나 힘들고 벅찼는지 알 수 있다.

 

유럽외 아메리카 대륙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

 

프로이센 지방은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튜튼기사단에 의해 1233~50년 사이에 정복되었는데, 이곳을 정복한 튜튼기사단은 거주하던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자리잡았다. 300년 가까이 기사단으로 유지하다 1525년 마지막 기사단장이었던 알브레히트가 루터교로 개종하여 가톨릭과 단절되어 기사단은 해체되고 프로이센 공국으로 올가가면서 오늘날 도이칠란트의 기원이 된다.

1466년,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게 점령되는데 군신관계를 조건으로 튜튼기사단의 영주권을 계속 인정해 주었다. 1618년 튜튼기사단의 마지막 영주였던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프로이센 공국은 그의 사위였던 요한 지기스문트에게 넘어갔다.

당시 요한 지기스문트는 당시 프로이센 공국의 훨씬 서쪽지방에 있던 신성로마제국 내의 브란덴부르크 공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알브레히트의 사망으로 요한 지기스문트는 프로이센 공국도 차지하게 되어 결국 두 공국은 하나로 합쳐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으로 바뀐다.

비록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한 나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고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영토라 공국의 모양새가 결코 보기 좋지 않았고, 더군다나 영토가 동서로 나뉘어 있어 발전하는데 큰 저해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의 영주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3년 수도를 브란덴부르크 공국에서 프로이센 공국 내에 있는 쾨니히스베르크로 옮겼고, 1648년에는 30년 종교전쟁의 대가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 영토의 중간에 있던 동포메른 지역을 얻었다.

1655년 스웨덴 왕국과 폴란드 왕국사이에 전쟁이 터지자(북방전쟁)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는 조건으로 폴란드 왕국을 지원하였고, 결국 폴란드 왕국이 승리하자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스웨덴이 차지하고 있던 서포메른마저 점령하였지만 프랑스의 압력으로 포기하였고, 대신 프랑스로부터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인정받는 올리바 조약(1660년)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1678년에 다시 서포메른을 점령했지만 프랑스의 저지로 좌절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지원병을 보내는 조건으로 정식으로 왕국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재탄생되었고,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 왕국의 1대 왕인 프리드리히 1세가 된다. 프리드리히 1세는 수도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병력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키우고 무기를 대량 업그레이드하여 유럽에서 4번째로 많은 군사대국이 되었다. 1715년에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포메른 전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는 병력의 규모를 20만 명까지 증원시켰다.

세력이 점점 커진 프로이센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정면충돌이 나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 주변 혈연국들이 반기를 들어 결국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 혼란에 빠진 상태였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이틈을 노려 1740년 11월 선전포고 없이 합스부르크령인 슐레지엔을 점령하였고, 그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결국 프로이센 영토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와 인구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 이후 폴란드 왕국이 쇠퇴하고 혼란이 일어나자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왕가, 러시아 제국은 1772, 1793, 1795년 3차례에 걸쳐 폴란드를 세 조각을 내어 서로 골고루 나눠먹어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세 나라는 폴란드를 나눠먹어 많은 영토를 획득하였다.

[신성로마제국 영토 내에서의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 ]

 

프로이센 왕국의 성장

 

폴란드왕국이 공중분해되는 과정

 

※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왕가, 러시아 제국이 1772, 1793, 1795년 3차례에 걸쳐 폴란드 영토를 나눠먹은 과정 ( 프로이센은 푸른색 계열, 합스부르크는 노란색 계열, 러시아는 초록색 계열)

 

그렇지만 프랑스에 대혁명(1789년)이 시작되면서 두 나라는 동맹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영국을 중심으로 모든 유럽나라들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프랑스로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로이센 왕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을 당하자 친정국가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1792년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프로이센도 혁명세력을 막기 위해 1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다.

 

[ 프랑스혁명 발발 및 나폴레옹 전쟁 직전인 17세기말의 유럽 영토 ]

 

프랑스 대혁명 당시 유럽 영토

 

[ 위 지도에서 신성로마제국 영토 확대 이미지 ]

 

1789년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 (갈색)과 프로이센 왕국(푸른색) 이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작은 나라들(일부는 너무 작아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음)이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 내 수백개의 영주국

 

외국 군대들은 정예 장군들과 잘 훈련된 군사들이었지만 프랑스 같은 경우는 달랐다. 대부분 장군들이 모두 귀족출신이라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처형되어 프랑스는 지휘관도 없었으며 지휘관이 없었으니 훈련병들도 군복만 입은 오합지졸이었다. 더군다나 군사 수만으로도 프랑스는 당시 8만 명의 군사가 전부였지만 다른 동맹군을 제외한 프로이센만 16만의 대군을 프랑스 전쟁에 투입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계란에 바위 치기 승부였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군은 전쟁 시작부터 패전의 연속이었고 계속되는 패전으로 프랑스 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왕실 내부적으로 권력을 되찾으려는 왕당파의 음모가 발생하여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5개월 동안 계속 패전을 거듭하던 프랑스 혁명군은 역사적인 첫 승리를 장식하는데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되었고, 훈련도 안된 혁명군들이 처음으로 동맹군의 정예 병사를 물리친 사건은 프랑스 혁명군에게 큰 사기를 주게 되어 그 이후부터 프랑스 혁명군은 승승장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부터 그의 뛰어난 전술에 힘입어 프랑스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두 나라는 점점 위기에 몰리게 된다. 프랑스는 추후 전세를 역전하여 프로이센 영토로 침공하였고 1795년 4월 5일 바젤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하였다. 승전국인 프랑스는 독일 영토인 라인란트를 얻었고 프로이센은 10년 동안 중립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와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어 1차 대프랑스 동맹을 종결시켰는데 프랑스로부터 많은 영토(네덜란드, 이오니아 제도, 북이탈리아)를 빼앗겼다.

 

[ 라인란트의 위치 - 지도 내 노란색 지역]

(해당 지역은 프랑스, 독일영토로 수시로 바뀌다 현재는 독일에 영구적으로 귀속되었다)

 

라인란트 영토

 

1798년 12월부터는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프로이센 왕국은 중립을 지켰고 합스부르크 왕가만 참전한다. 그 외 영국, 러시아,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여한다. 나폴레옹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합스부르크령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마렝고 전투, 홋호슈탓토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였고, 그 후 계속 북상하여 뮌헨에서 치른 호엔린덴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큰 피해를 입혔다.

 

1801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항복했으며 이탈리아 반도와 네덜란드 통치권을 프랑스에 양도한다는 뤼네빌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하였다. 또한 1차 전쟁에서 할양받았던 라인란트도 프랑스령으로 인정하였다.

 

1805년부터 다시 제3차 대프랑스동맹이 다시 결성되었는데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빼앗은 하노버를 양도해 준다는 조건으로 중립을 유지하였고 합스부르크 왕가만 참전하게 된다. 그 외 영국, 러시아. 나폴리, 스웨덴이 참전하였다.

 

동맹군이 3차 대프랑스 전쟁을 선포한 지 한 달 후인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왕국을 "프랑스 제1제국"으로 선포하였고 1년 후인 1805년 5월 26일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설립 후 왕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유럽에서 또 다른 황제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다. 프란츠2세는 자신이 유럽에서 가장 우월한 황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두 개의 황제의 타이틀을 갖기로 하였다. 이에 합스부크르 왕가라는 명칭을 버리고 동군연합상태로 있던 왕가의 영지들을 하나로 모아 정식 국명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황제인 프란츠 1세로 올랐다. 이때가 1805년 8월 11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국호는 이때부터 부르게 되었다. 프란츠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을 견제하였다.

 

이미 2년 전인 1803년에 영국-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인 아이맹조약을 영국이 파기하자 두 나라는 다시 대립상태가 되었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년 후인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결성하여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세우는데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제독이 이끄는 영국군의 승리로 영국 본토 침공이 저지되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황제 데뷔전이었던 울름전투 승리 후에 첫 패배였다.

 

해전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육전에서 만회하게 된다. 먼저 오스트리아 제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과 대항하였지만 나폴레옹은 울름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수도 비인을 점령하였고, 계속 전진하여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과 맞붙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8만 5000명의 대군을 무려 하루 만에 전멸시킨 후에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켜 버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 바로 나폴레옹의 대관 1주년 기념일인 1805년 12월 2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 개선문을 세웠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 사진은 베르사유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1805년, 앙투안 장 그로스 그림)  이 전투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의 배경이 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에서 빛나는 승리 중의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삼제회전 전투였기 때문이다. 삼제회전(三帝會戰;Battle of the Three Emperors) 전투라는 말 그대로 전쟁터에 장군이 아닌 황제가 모두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전투였는데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 신성로마제국 겸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 황제 이렇게 3명의 황제가 맞붙은 전투로 가장 역사상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와 마찬가지로 전술상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시 프랑스를 상대로 맺었던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무효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옛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와 프러시아의 서남부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어 속국이자 라인동맹이라는 위성국가를 만들어 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비록 신성로마제국이 허울뿐인 제국이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게르만 민족에게는 로마제국을 이었다는 정통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800년 넘게 이었다는 존재만으로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패배 후 허울만 남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을 양위하는 선으로 명맥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나폴레옹은 1806년 8월 10일까지 황제 퇴위 요구와 함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오스트리아 정부는 1806년 8월 6일 오전에 신성로마제국을 해체 후 황제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84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면서 신성로마제국내의 300여 개의 작은 나라들도 신성로마제국 연방에서 모두 해체되어 각자의 개별 공국으로 독립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도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만 불리게 된다.

신성로마제국 멸망 후 나폴레옹은 3차 동맹 참전국인 나폴리왕국을 정복한 후 자신의 형 조셉을 왕으로 임명하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혁명 직후부터 1806년까지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전역, 오스트리아까지 정복하였고 정복당한 나라는 프랑스의 위성 공화국이나 식민지, 그리고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나폴레옹은 구 신성로마제국 영토의 서쪽지방에 있던 16개의 소국을 하나로 독립시켜 "라인동맹"이라는 나라를 설립하는데, 이 나라는 나폴레옹의 동맹국이자 연방국가 형태로 건국되었으며 프랑스의 전쟁에 많은 군사를 동원하는 의무를 갖고 있었다. 라인동맹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차츰 세력을 키워나가 주변 공국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굳이 라인동맹을 건국하고 라인동맹의 세력을 키워준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왕국 사이에 하나의 다른 세력 있는 나라를 만듬으로 인하여 프랑스는 그만큼 안전해지는 것이고 프로이센에게는 국력이 분산되어 프랑스에게 대항하지 못하기 위함이었다. 30년 종교전쟁 당시 프랑스 재상 리슐리에와 마자랭이 했던 것과 같이 나폴레옹 역시 독일연방 국가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여 프랑스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라인동맹에 프랑스 군사 20만 명을 상시 주둔시켜 이웃국가인 프로이센을 자극했고, 프로이센은 라인동맹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 철수를 여러 번 요구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결국 10년 간의 중립을 파기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3세는 군사적으로나 국력으로나 불리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했지만, 왕비와 황태자의 설득에 결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1806년 10월 6일 영국, 러시아. 스웨덴, 작센왕국 결성)하였고 10월 9일에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여 15만 명의 대군을 프랑스 전쟁에 투입하였다.

그렇지만 프로이센을 2류 국가로 취급했던 나폴레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해 10월 10일 잘펠트 전투와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연달아 크게 패하였고 황태자가 전쟁에서 죽는 불운까지 당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이 기세를 몰아 25일에는 수도 베를린까지 점령하였는데,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연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를린 점령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19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북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로 도피한 후에 임시수도로 삼았다.

[ 프랑스 사령관 '란' 원수의 "잘펠트 전투에서의 승리" - Auguste-François Desmoulins의 작품]

 

잘펠트 전투 중
잘펠트 전투에서 전사하는 페르디난트 왕자 (전사당시 34살)

 

1806년 10월 27일, 점령한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 Charles Meynier 작품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 후 시가행진을 이어가자 베를린 시민은 오히려 나폴레옹을 자신들의 해방자라고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 후 프랑스 군대는 동남향으로 진로를 바꿔 1807년 2월 7일부터 8일까지 프로이센-러시아 동맹군과 아일라우 전투를 치렀다. 추운 날씨 영향과 동맹군의 선방으로 프랑스는 초반에 많은 고전을 하였지만 추후 전세를 역전하여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초반에 많은 군사를 잃어 겨우 무승부로 끝냈다.

 

3개월 후인 5월, 나폴레옹은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동진하여 폴란드 영토로 진격하였고, 다시 맞붙은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과 러시아 동맹군을 대파하였다. 16일에는 쾨니히스베르크마저 점령하였다. 결국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프랑스에 항복하였으며 틸지트 조약을 체결(7월 7일~7월 9일)하여 결국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지시를 내리는 나폴레옹 - Horace Vernet 작품

 

틸지트 조약의 주내용은 프로이센은 국토의 절반이상을 프랑스에 양도하며, 1억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보상하는 조건인데, 이 배상금을 값을 때까지 프러시아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영토 중에서 일부는 라인동맹에 편입시켜 버렸고,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위성국인 베스트팔렌 왕국을 설립 후 자신의 동생 제룸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임명하였다. 전쟁에 패한 프로이센은 많은 영토를 빼앗겨 다시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분할 점령당해 멸망했던 옛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시켜 바르샤바 대공국을 설립했다. 폴란드 국민은 나폴레옹을 폴란드를 독립시킨 영웅으로 추앙하며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은 동지자이자 작센지방 왕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왕으로 올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에 1815년 빈 회의로 인하여 폴란드는 다시 주권을 빼앗기고 다시 100년 동안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게 된다.

프로이센, 러시아 전쟁을 종결한 후에는 대륙봉쇄령을 어긴 포르투갈을 지나간다는 명목으로 스페인 영토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주요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당시 권력을 다투던 카를로스 4세와 아들인 페르디난트 7세를 몰아내고 모두 프랑스로 압송하여 유폐시킨 후에는 스페인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형인 조셉을 스페인의 왕인 "호세 1세"로 임명하였다. 그 후에 포르투갈도 정복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에서 그의 위상을 크게 떨쳤다. 덴마크는 처음부터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꾸준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 제1제국의 전성기

 

(1) 나폴레옹 제국의 영토

(2) 라인동맹은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프로이센을 정복한 후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서 옛 두 나라의 서쪽 영토를 떼어내어 새로운 위성국을 설립한 것임. 북 라인동맹은 베스트팔렌왕국을 선포하여 자신의 동생인 제룸을 왕으로 올렸지만 추후 라인동맹으로 흡수됨.

(3) 나폴리왕국, 바르샤바 대공국, 스위스,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점령 후 형제들을 왕으로 올린 위성국가들임 (나폴레옹은 헬베티카 공화국(스위스), 라인동맹, 바르샤바 대공국을 지배하였음)

(4) 네덜란드, 벨기에는 위성국이었다가 프랑스 영토로 병합,

(5) 오스트리아제국,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의 속국임

 

[ 나폴레옹 제국 당시의 북아메리카 대륙 프랑스 영토 ]

 

※ 당시 루이지애나 주는 프랑스 영토였지만 1803년 나폴레옹이 관리비용 부담으로 미국에 헐값에 넘김, 덕분에 미국영토는 2배 늘어나 서부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루이지애나주 영토

 

그 후 프랑스에 점령당한 스페인 국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통해 나폴레옹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게릴라전은 나폴레옹이 위장병으로 시달리게 할 정도로 힘들게 했다.

영국은 이 기회를 노려 스페인 게릴라와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결국 스페인 영토에서는 '반도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프랑스 군이 연합군에 밀리는 것을 지켜본 오스트리아제국은 프랑스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영국과 손잡고 결국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1809년 4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5차 대프동맹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오스트리아 모두 수많은 사상자를 낼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포르투갈-영국-스페인 게릴라 연합군이 프랑스에게 대항하였지만 프랑스 군대는 워낙 육군이 강력하여 밀리지 않고 카디스 항구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포르투갈, 스페인 연합군은 지속적으로 프랑스 군을 괴롭혀 1812년이 되어서야 프랑스를 이베리아 반도 전 지역에서 겨우 몰아낸다.

유럽 반도에서는 에크뮬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한 프랑스 군대는 그 기세를 몰고 가 비인으로 진격하였다. 다시 맞붙은 아스펜과 에슬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고 결국 나폴레옹이 직접 이끄는 이 전투에서 첫 패전을 얻었다.

그렇지만 지원병을 갖추고 정렬을 재정비한 후에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던 바그람 전투(1809년 7월 5일~6일)에서 프랑스의 압승으로 끝나 쇤부른 조약(1809년 7월 11일)을 맺어 제5차 대프랑스 동맹도 해체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카렌시아, 카르니올라, 아드리아 해의 항구를 빼앗아 프랑스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는 8만㎢가 넘는 영토였다. 이 과정에서 인구의 1/5인 300만 명의 인구도 영토와 함께 넘겨주고 수많은 전쟁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럽 여러 나라들은 다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프로이센 왕국도 다시 참전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제국은 패망하였고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유럽 나라들은 다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때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참전하여 나폴레옹을 저지하여 결국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의 1818년 프로이센 영토 ]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 영토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에 1815년 빈회의로 인해 프로이센 왕국은 예전 영토와 (구) 베스트팔렌왕국 영토를 획득하였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제국과 연합하여 덴마크 남쪽지방을 정복하였고 그 외 주변 공국들을 정복하여 서서히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는데 도이칠란트 남쪽지방으로 정복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정면충돌이 일어났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래전부터 모두 게르만민족의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연방주의를 내세우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연방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는 도이칠란트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쟁은 불가피하였다.

결국 프로이센은 1866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두 달간의 기나긴 전쟁에 돌입한 끝에 쾨니히그레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4만 명 가까이 전사하면서 프로이센의 최종 승리로 끝났고 8월 23일 프라하 조약으로 마무리하여 도이칠란트 내의 오스트리아 제국령의 모든 영토를 할양받았다. 도이칠란트 내의 모든 영토를 잃은 오스트리아는 통일 도이칠란트 제국에 의해 독일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 후 도이칠란트 연방 내의 나머지 미니 공국들을 모두 정복하여 독일 전 영토를 하나로 통일하게 되는데 이때가 1871년이다. 베르됭 조약으로 분열된 지 무려 1000년 만에 한 나라로 통일된 것이다. 이때의 영웅은 철혈 재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 국호를 도이칠란트 제국으로 바꾼다. 통일 도이칠란트 제국을 "독일의 제2제국"이라고도 부른다.

 

프로이센 왕국의 도이칠란트 영토 통일 과정

 

도이칠란트 내의 모든 영토를 잃은 오스트리아 제국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당시 대립하던 헝가리 지역의 귀족들과의 '대 타협' 이루어지게 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탄생이었다.

타협의 내용은 오스트리아는 마자르 족의 헝가리왕국의 건국을 허락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헝가리 국왕을 겸함으로써 두 나라를 하나의 제국으로 합친다는 조건이었다. 그 외 군사 ·외교 ·재정을 공동으로 하는 외에도 각각 별개의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독립된 정치를 행하며, 10년마다 갱신되는 관세 및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수도는 비인과 부다페스트 모두 사용했으며, 1867년부터 1918년까지 51년 동안 한 나라 체제를 이어나간다.

 

갓 통일한 도이칠란트 제국의 비스마르크 수상은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꺾었고 프랑스마저 꺾어야 유럽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프랑스에게는 수백 년 넘게 수많은 간섭과 침략을 당해 국민 간의 감정도 매우 안 좋았고 나폴레옹 시기에는 프랑스에게 완전히 굴욕을 당했던지라 프랑스와의 전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판단하여 내부적으로는 이미 프랑스에 대한 전쟁준비를 이미 시작했고 엠스 전보사건을 일으켜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프랑스의 선전포고 후 프랑스가 전열을 가듬기도 전에 프로이센은 프랑스로 침공하였고, 프랑스가 전쟁 준비도 하기도 전에 마르스라투르 전투, 그라블로트 전투, 스당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하였고 특히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는 수확까지 거두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보상금을 도이칠란트 제국에게 보상하고 200년 전 30년 종교전쟁으로 빼앗겼던 로렌, 알자스 지방을 다시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도이칠란트 제국의 내실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다지는 방향으로 추진하려고 했지만, 새로 즉위한 혈기 왕성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자극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함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어 결국 비스마르크를 사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빌헬름 2세의 정책결과로 주변국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어 결국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의 연장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도 화해 후 동맹을 맺었고,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를 침공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을 끌어들여 "3국 동맹"을 결성한다. 프랑스와 영국은 통일된 도이칠란트를 견제하기 위하여 500년간의 적대국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하였고 다시 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니 이를 "3국 협상"이라고 한다.

 

1차 세계대전 직전의 통일 도이칠란트 제국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영토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총살되어 시작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던 독일도 러시아,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다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 일본까지 전쟁에 가세하여 전 세계는 9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자원부족 그리고 미국이 연합군에 가담하여 200만 대군을 유럽게 파병을 하면서 결국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만다.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1919년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14개에 의하여 회의가 진행되었다. 민족자결주의란 쉽게 말해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민족은 지배민족으로부터 독립한다는 내용이 주 내용인데, 이 내용이 패전국에게만 적용되다 보니 유럽대륙에 큰 영토를 자랑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사실상 두 나라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제외대상일 수 밖에는 없었고,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은 예전처럼 다시 도이칠란트를 조각내고 싶었지만 도이칠란트는 게르만이라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각낼 명분이 없었고 여러나라들이 참전한 전쟁이라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1차 대전 전의 유럽지도

 

1차 대전 후의 유럽지도

 

1. 1차 세계대전 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으며 루마니아는 영토를 획득함. 분열로 인하여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약소국으로 전락됨.

2. 도이칠란트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무너지자 동유럽은 제국주의가 붕괴되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가는 시발점이 되었음

3. 도이칠란트 제국은 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왕정이 폐지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국호로 바뀌었음.

 

1차 세계 대전 후 잃어버린 독일 영토

 

1. 1차 대전 후 독일은 일부 영토를 잃게 되는데 왼쪽 파란 작은 지역은 벨기에 영토로 편입되었고, 그 아래 파란 지역은 로렌-알자스 지방으로 1638년 종교전쟁 때 프랑스가 빼앗은 지역을 1701년 프로이센 전쟁 승리 후 되찾았다가 1차 대전 결과로 프랑스가 다시 빼앗았다.

2. 우측 파란 지역 대부분은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었으며, 우측 제일 위의 파란 영토는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여 얻었다.

 

비록 일부 영토를 빼앗겼지만 분열되지 않은 도이칠란트는 국력을 유지한 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고, 때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경제공황에 큰 타격을 맞게 되었다. 승전국들은 식민지가 있어 식민지와 무역을 하여 경제공항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그 당시 식민지가 없었던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일본은 타국의 식민지를 빼앗을 필요가 있었고 결국 전쟁보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도이칠란트가 베르사유 조약(1차 대전 후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폴란드의 단치히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이끈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인데, 히틀러가 이끄는 도이칠란트 제국은 승승장부하여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점령하여 큰 기세를 떨쳤다.

 

원래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고, 원래 직업도 군인이 아닌 화가지망생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지망생이 나치당에 들어가서 독일의 재상이 된 것이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에 가장 먼저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독일 영토로 합병시켰는데 같은 게르만 민족의 단합이 그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게르만 민족이 인종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선언하여 국민들의 열등감을 덜어주었고 이에 대한 억지 근거로 인종차별주의 정책이 나오는데 첫 번째 목표대상이 유태인, 두 번째로 집시족이었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의 80%가 독일 나치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덩달아 집시족까지 모두 살육 하는 자행을 저질렀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제국 최대 영토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국호를 폐기하였고 " 독일 제3제국 " 으로 선언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에 소련과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불가침조약을 맺은 터라 히틀러 군대는 서쪽으로 병력을 쏟는데 유리했었지만, 히틀러의 과욕으로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도이칠란트 제국은 결국 패망하게 된다. 도이칠란트 소련의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만 무려 200만 명 가까이 전사하는 대 전투를 겪었지만 결국 홈구장의 이점(?)을 얻은 소련의 힘겨운 승리로 끝나고 서쪽에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작전이 성공하여 동서로 진격해 오는 연합군의 위세에 눌려 결국 도이칠란트의 패전으로 끝나게 된다.

 

두 번의 도이칠란트의 전쟁이 질린 열강들은 결국 독일이 힘을 못 쓰도록 두 번의 정상회담(얄타, 포츠담)을 거쳐 4개로 분할(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령)로 분할하기에 이른다. 1차 대전 결과와 마찬가지로 다시 영토의 일부를 잃게 된다.

 

1,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영토 종합

 

(1) 왼쪽 아래 하늘색 영토 - 철광석이 풍부한 로렌, 알자스 지방으로 1618~48년에 있었던 신, 구교 종교전쟁으로 승전국인 프랑스에게 빼앗겼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도이칠란트 통일 후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전하여 다시 되찾았지만, 2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다시 승전함에 따라 다시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2) 왼쪽 위 하늘색 영토 - 1차 세계대전 후 벨기에 영토로 편입되었다.

(3) 오른쪽 하늘색 영토 - 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폴란드로 영토로 넘어간다.

(4) 초록색 영토 - 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 영토도 편입되었다.

(5) 노란색 영토 -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영토와도 떨어져있어서 독일정부에서는 현재도 이 땅의 매입을 꾸준하게 진행 중이라고 한다.

(6) 북쪽 하늘색 영토 - 2차 세계대전후 덴마크 영토로 편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후 독일이 영원히 힘을 못 쓰게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함

 

(1) 추후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역은 서독으로 바뀌고 소련 점령지역은 동독으로 바뀐다.

(2) 동독 가운데 보면 또다시 색갈이 나누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수도인 베를린이다. 베를린도 역시 네 나라가 분할 점령하였는데 나중에 동독, 서독으로 바뀌면서 베를린도 서베를린, 동베를린으로 나뉘게 되고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라 떨어져 있는 영토, 즉 "육지의 섬"으로 불리게 된다. (아래 그림)

 

육지의 섬으로 부르게 된 서베를린

 

그리고 오스트리아 역시 미영프 연합군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연합국에 분할 점령된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분할점령의 원인은 독일과 같은 게르만족으로 구성된 데다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의 단합을 근거로 가장 먼저 점령한 후 독일영토로 강제 합병 시킨 것 그리고 히틀러의 모국인 것도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영프 연합군과 소련은 오스트리아를 독일 영토 일부로 규정하고 4등분 해서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는 10년 뒤인 1955년에 영구 중립국을 선언하였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다시 살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영프 연합군, 소련은 모두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하였고 독일처럼 두 동강 나는 수모를 겪지 않게 되었다.

 

2차 대전 후, 소련과 미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적이 대립하는 형세로 바뀌자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는 서독으로 바뀌고 소련 점령지는 동독으로 바뀐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결국 1990년, 다시 한 나라로 통일하게 된다. (통일됐으니 다시 전쟁 일으킬까 걱정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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