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작성 + 인터넷]
흔히 나폴레옹의 정인으로는 조세핀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세핀을 만나기 전에 약혼까지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데지레 클라리다. 프랑스 풀네임은 베르나르딘 외제니 데지레 클라리 (Bernardine Eugénie Désirée Clary)이고, 스웨덴 풀네임은 에우헤니아 베르나르디나 데시데리아(Eugenia Bernhardina Desideria)이다. 그녀의 초상화의 대부분은 황후가 된 이후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그녀의 조상은 아일랜드계이며 외조부가 프랑스로 마르세유로 이주하였고 상인으로 크게 성공하여 도시 내 큰 실세로 자리 잡았다. 데지레는 1777년 11월 8일에 이복남매를 포함하여 총 12명의 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부유하게 성장했다. 남매들 간에 나이차가 많다 보니 바로 위 언니인 쥘리와의 관계가 돈독하여 스웨덴에 가기 전까지 평생을 함께 지냈다. 나폴레옹 가족은 고향인 코르시카 섬에서 반역죄로 쫓겨나 프랑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가까웠던 프랑스 항구도시인 마르세유에 정착하였고 그때 클라리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나폴레옹이 군대에서 받는 급여만으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가족들은 마르세유에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 나섰는데, 특히 나폴레옹의 형이자 장남이었던 조세프는 그때 마르세유에서 부유했던 상인 가문이었던 클라리가의 쥘리와 결혼하였다. 원래 조세프와 혼담이 있던 여인은 데지레였으나, 데지제와는 나이차가 있었고 당시 나폴레옹의 설득으로 결국 조세프는 쥘리와 1794년 결혼하게 된다.
쥘리가 결혼 지참금으로 많은 재산을 가져오면서 조세프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점차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데지레와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나폴레옹이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인생의 좌절을 겪어 큰 시련을 겪었던 당시 위로해주던 데지레와 가까워졌으며, 나폴레옹은 그때 잠시 자신의 야심을 접고 그녀와의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데지레와 결혼을 결심하지만 그 당시 데지레가 미성년자이다 보니 약혼을 먼저 하게 된다.
사실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에서 성공하고 싶었으나 오히려 반역자로 몰려 가족 모두 프랑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인으로 살면서 프랑스에서 성공할 거라는 야심을 서서히 키웠고 프랑스의 정치인들.. 특히 로베스피에르 눈에 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웠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에 반역자로 몰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시기에 데지레와 결혼하여 평범한 군인으로 살지 초심을 버리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살지 큰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고민을 한 번에 뒤엎는 사건이 생겼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나폴레옹을 방데 지방에서 일어나는 보병 육군 사령관으로 발령장을 내렸고 그 발령장은 받은 나폴레옹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음 없었다.
방데 지방은 프랑스 인들의 내부 반란이 잦은 지역인 데다 방데로 간다는 건 좌천이라는 장군들의 인식이 너무 강했고 실제로 방데로 한 번 발령받은 장군들이 그 이후의 일생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사실을 알고도 나폴레옹을 방데로 보내려고 했었는데 사실 이 같은 정부의 결정은 한때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했던 나폴레옹을 견제하려던 정치 세력의 음모도 있었다. 나폴레옹이 격분했던 또 다른 이유는 나폴레옹의 보직은 포병이었고 포병장교로서 프랑스 내에서 실력과 역량을 검증받은 장군이었는데 포병이 아닌 보병 장교로 발령 냈다는 건 나폴레옹에게는 전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결정에 결국 나폴레옹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고 데지레와도 이별하게 되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 "반드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파리로 떠났는데 이때의 헤어짐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파리로 떠난 직후에 형 조셉에게 "데지레와 헤어질지 결혼할지 선택해야 할 거 같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파리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국방부로 찾아가 항의했으나 권력이 없던 나폴에옹은 국방부 입장에서는 진상 손님에 지나지 않았고 무참히 쫓겨났다. 그러나 끝내 방데로 가지 않았고 다시 재기하기로 마음먹고 많은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파티에 잠석하면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이때 한 파티에서 조세핀을 만나게 된다.
조세핀은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아들과 딸 등 두 명의 자녀를 둔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나폴레옹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1143쪽에 이르는 프랭크 매클린의 평전 『나폴레옹』에 따르면 그녀는 폴 바라스, 라라즈 오슈 등 프랑스혁명 혼란기의 실력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바람둥이였으며, 결혼 후에도 남편이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젊은 청년과 바람을 피웠다. 책은 전혀 읽지 않고 오로지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는 데 거액을 써서 늘 빚에 허덕거렸다.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장 사치스러울 때 한 해 170벌의 의상을 구매했던 데 비해 조세핀은 한 해 900벌, 장갑은 1000켤레나 사들였을 정도였다.
조세핀과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 않았으나 출세욕에 눈이 멀어 자신을 버리고 사교계를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또한 그 시기에 파리에서 코윈 반란 폭동이 일어나자 나폴레옹은 당시 총재정부 사령관이었던 바라스에게 반란 진압 사령관으로 임명받았고, 수개월동안 이어진 폭동을 반나절만에 제압한 나폴레옹의 인기가 치솟자 나폴레옹은 사교계 마담들로부터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조세핀은 이런 상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폴레옹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당시 조세핀은 사교계를 주도하는 여인 중의 하나로 그녀의 관능미에 나폴레옹도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들었는데, 그녀와의 나이 차이와 자녀는 사랑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르세유에 있던 데지레는 점차 잊게 된다.
사실 나폴레옹은 파리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데지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마음과 애정을 수시로 확인하였으나 조세핀과 교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서서히 그녀에게 마음을 접기 시작했으며, 특히 사교계의 여신이었던 조세핀으로부터 프랑스 내 굵직한 중요 정치인물들과의 만남이 이어질 때가 많았는데 이것이 나폴레옹의 출세길을 열어주게 된다. 여러모로 조세핀이 자신의 성공에 도움이 된다고 한 나폴에옹은 데지레에게 어떠한 이별 통보도 없이 1796년 조세핀과 결혼했고 뒤늦게 알게 된 데지레는 당시 큰 충격을 받는다.
나폴레옹에게 버림받은 데지레는 큰 충격을 받고 당신이 내 삶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고 한 동안 나폴레옹을 빼앗은 조세핀을 증오하였다. 그 후 가족들과 잠시 제노바에 머물게 되는데 여기서 여러 프랑스 장군들에게 청혼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뒤포 장군이 1797년에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데지레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 후 언니 쥘리와 조셉과 같이 로마에 잠시 거주하다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데지레는 그때 조세핀과 처음 만났으나 여전히 그녀를 증오했고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여동생들도 조세핀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도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쥐노와 마르몽 장군에게도 청혼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한다.
그 후 파리에 지내면서 조셉을 통해 한 명의 장교를 소개받는데 바로 베르나도트였다.
베르나도트는 말단 병사에서 장군에까지 올라서게 된 인물로 민중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어 한때 나폴레옹의 라이벌로 주목받아 한때 자코뱅파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처세로 인해 나폴레옹에게 한 발 늦어 권력을 빼앗기기도 했다. 데지레와 베르나도트 모두 나폴레옹에게 공통된 감정을 가졌기에 둘은 금방 가깝게 되었고 이것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끌게 된다. 결국 둘은 1798년 8월 12일에 마르세유에서 결혼하여 정식부부가 되었다. 이때까지 데지레가 수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모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는 휘하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는 프랑스를 위해 어느 정도 협력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노선을 스스로 확고히 하면서 기반을 잡은 인물이기에 충분히 나폴레옹과 대적할 만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베르나도트는 휜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로 당시 파리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훗날 황후가 된 이후에 베르나도트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가 나폴레옹을 대적할 만한 남자라고 실제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이듬해인 1799년 7월 4일에 아들 오스칼을 낳았는데 오스칼이라는 이름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어준 거라고 한다. 두 사람의 금술은 매우 좋았다고 하며 데지레는 정치와는 담을 쌓고 남편의 내조와 아들을 키우는데 전념하면서 전형적인 가정 주부의 삶을 살게 된다. 데지레는 점차 베르나도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언제나 그와 함께 하길 원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자 가정 주부였고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베르나도트는 항상 전쟁을 위해 집을 자주 비웠고, 그가 집을 떠난 후에는 항상 그를 그리워했고 돌아왔을 때에는 또 언제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자주 울었다고 한다. 데지레는 남편이 밖으로 돌아다니기보다 자신의 가족들과 왕래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기 원했으나 남편의 직업 특성상 그럴 수가 없었다.
데지레 역시 평범한 장군의 아내로 살 수 있었지만 그녀의 운명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베르나도트는 프랑스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나폴레옹 휘하에서 같이 프랑스를 위해 맞서 싸웠고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에 오르자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원수로 임명되었다. 1805년 3차 대프랑스 동맹이 시작되자 베르나도트는 다시 전쟁터로 나가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퐁트 코브르 대공의 호칭까지 받아 승승장부한다.
사실 베르나도트가 대공의 지위를 얻은 건 데지레의 공이 컸다. 베르나도트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 데지레는 나폴레옹과 자주 만나며 다시 가까워졌고 서서히 불륜으로 발전했는데 나폴레옹은 그에 대한 미안한 감정으로 베르나도트에서 대공의 작위를 내렸던 것이었지만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베르나도트는 아내를 용서해 줬지만 나폴레옹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806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는 예나와 아우어수테트 전투에서 연달아 대프랑스 동맹군을 전멸시켰고, 전쟁이 시작된 지 단 19일 만에 프로이센의 베를린까지 점령한다. 이 전투는 사실상 나폴레옹과 다부 장군 두 사람의 독무대였고 뒤늦게 합류한 베르나도트에게는 전과를 세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유능한 블뤼허 장군에게 항복을 받아내 잠시 나폴레옹의 마음을 돌렸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프로이센 패잔병 추격 도중 우연히 끼어든 스웨덴 포로들에게 큰 인정을 베풀었는데 나폴레옹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주변 인근 국가인 덴마크를 넘어 스웨덴에게도 전해지는 바람에 그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된다.
5차 대프랑스 동맹 당시 바그람 전투에서도 베르나도트는 여러 번 삽질만 하다 나폴레옹에게 여러 번 질책을 들었고 나폴레옹 덕분에 이긴 바그람 전투 승전사에서도 나폴레옹의 전공을 작센군의 전공으로 바꿔 읽는 대형사고를 내는 바람에 한동안 나폴레옹에게 신임을 잃었다.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작센인으로 구성된 2진급 군단을 중앙에 배치시켰는데 그 의도는 베르나도트에게 불신의 마음을 키우기에 충분했고, 나폴레옹의 오판으로 실패한 야습을 베르나도트가 뒷수습을 하는 바람에 군단장 회의에도 배재되어 두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그 이후 벌어진 네덜란드, 영국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다.
1808년에 벌어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는 아예 배제되어 그 어떤 보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직을 잃고 방황하던 베르나도트에게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1년 뒤인 1809년 스웨덴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노령의 칼 13세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워낙 고령이었던 데다 그의 후계자인 칼 아우구스트도 1810년에 급사하자 스웨덴 정부에서는 새로운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고 여러 논의 끝에 프랑스의 육군 원수 중에서 유능한 장군을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 이는 사실상 스웨덴에서 서서히 인지도를 얻고 있었던 베르나도트를 간접적으로 지목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웨덴 후계자로 추천을 받기 위해 여려 명의 외교관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나폴레옹을 접하여 그의 의중을 물어본다. 외교관 중의 한 명인 뫼르네르 남작은 베르나도트를 직접 만나 개종만 한다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이상 새로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는 사실 예의상 나폴레옹의 양아들이자 조세핀의 아들이었던 오이겐에게 가장 먼저 후계자 제의를 했으나 오이겐이 스웨덴 국교인 루터교로 개종을 거부하여 결국 베르나도트로 마음을 정했다. 이를 모르던 나폴레옹은 여러 장군을 추천했으나 이미 베르나도트로 마음이 기울인 스웨덴 측은 모두 거절했고 결국 8월 21일에 베르나도트를 지목하자 차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전 연인이었던 데지레를 의식해 자신과 결혼하지 못하여 왕비가 되지 못한 그녀가 스웨덴의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위안 삼아 결국 베르나도트를 스웨덴의 후계자로 낙점하는데 동의하게 된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어 스웨덴으로 건너갔고 칼 13세 재위기간 동안 섭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집정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칼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데지레는 1년 후인 1811년 아들인 오스칼과 함께 스웨덴 궁정으로 이주하였고 본격적으로 궁궐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데지레는 스웨덴의 언어,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따뜻한 지중해의 날씨와 달리 한기가 서려있는 스웨덴의 추운 환경도 그녀가 적응하지 못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더군다나 전 왕비 샤를로테의 텃세에 시달려 결국 반년만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혼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황태자비의 신분인 만큼 마르세유에는 가지 못했고 파리에 머무르면서 왕태자비로서의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파리에 살면서 살롱을 자주 열었는데 예전에는 나폴레옹 가족들을 비롯한 나폴레옹 친인사들 위주로 교류했으나 혁명 이후 프랑스에 복귀한 왕당파 귀족들, 스웨덴 귀족, 그리고 반 나폴레옹 사람들과 주로 교류했다. 특히 외교관 부인들과도 어울렸는데 영국 외교관 부인인 엘리자베스와 자주 어울려 영국 대사관에도 자주 갔다.
그녀가 파리에 머물면서 국제 정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자 1813년 제6차 프랑스 대동맹이 결성되었는다. 이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동맹군에 참여하여 스웨덴까지 전쟁에 가담시켰고 장교 시절 알고 있던 중요한 전투 정보와 작전 그리고 전술 등을 동맹군에게 알려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1814년, 베르나도트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의 정식 국왕으로서 칼 14세로 왕위에 올랐고, 스웨덴에서는 베르나도트 왕가가 시작된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한 애착이 워낙 강했던 데지레는 왕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파리에 살기 고집하다 자신의 아들 오스칼이 결혼하자 결국 마지못해 12년간의 파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간다.
스웨덴에 정착한 뒤에는 데시데리아로 부르게 되었으며, 칼 14세는 늦게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아내를 위해 1829년 성대한 대관식을 치러준다.
스웨덴 왕궁은 황후와 새로운 왕세자비로 인해 잠시 활기를 띄었으나 데지레는 궁정의 삶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 남편인 칼 14세에게 간청했으나 칼 14세는 국법상 왕비가 외국에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고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녀가 프랑스를 떠날 당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저택과 사업체 모두 그대로 두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간청했으나 칼 14세는 아내가 더는 혼자 타지에서 머무를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실 데지레는 스웨덴어를 할 줄 몰라 언어 장벽으로 인한 삶과 지중해의 따뜻한 날씨와 달리 추운 나라에서의 삶에 적응이 안 되어 많이 힘들었으나 아들인 오스칼이 스웨덴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에 아들을 많이 의지하였다, 칼 14세 역시 스웨덴어를 전혀 구사할 줄 몰랐기에 아들인 오스칼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많이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스웨덴 궁정 내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아 큰 문제는 없었다.
칼 14세는 1814년 노르웨이를 병합하는 킬 조약에 성공하여 연합왕국을 성립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국외보다 국내 산업 발전과 국력 신장을 이루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칼 14세가 재위 30년 후인 1844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녀는 태후가 되었고 아들은 오스카르 1세로 즉위한다. 남편의 죽음에 데지레는 큰 상심에 빠져 밤과 낮이 바뀌는 삶을 살면서 상식 밖에 행동을 많이 하면서 아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특히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곁에 두는 걸 좋아하다 보니 오스카르 1세는 어머니를 큰 궁전에 모셨고 어머니 지인들이 편안하게 자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데지레는 외부로 눈을 돌려 국민들을 위해 여러 자선사업에 열정을 쏟았는데 특히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오스카르 1세는 재위기간 동안 양성평등법을 도입하고 의무교육을 실행하는 등 진보적인 개혁을 이루어 스웨덴이 복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자유주의적인 정치를 주도하여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나, 사생활에서도 자유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두 명을 정부를 두는 등 그 외 여러 여자들과 염문을 낳아 왕비 요세피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오스카르 1세는 왕비 요세피나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고 2명의 정부를 통해 2남 1녀를 두었다.
오스카르 1세는 재위 15년 후인 1859년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데지레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다음 해인 1860년 12월 17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데지레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나폴레옹'이었다고 하며 그녀의 방에서는 나폴레옹과 주고받았던 다수의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
스웨덴의 베르나도트 왕가는 1818년 칼 14세가 즉위한 뒤로부터 2025년 현재까지 스웨덴의 명실명부한 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와 데지레의 후손들은 현재 덴마크, 룩셈부르크 왕가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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