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에 가려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나폴레옹 2세의 풀 네임은 나폴레오네 프란체스코 주세페 카를로 부오나파르테(Napoleone Francesco Giuseppe Carlo Bonaparte)이고 1811년 3월 20일에 파리의 튈트리 궁전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2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장녀인 마리루이즈 도트리슈로 사실 그녀가 나폴레옹과 정략 결혼한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결국 소용없어 반강제적으로 프랑스로 시집을 갔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1세에 별로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지극정성한 애정공세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 어느덧 나폴레옹 1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렇게 아들인 나폴레옹 2세를 낳게 된다. 나폴레옹 2세를 출산할 때 당시 심각한 난산으로 의사들은 태아와 황비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나폴레옹 1세는 왕비를 선택하라고 할 정도로 마리를 극진히 아꼈으며 결국 무사히 출산하였고 둘 다 생존할 수 있었다. 마리는 나폴레옹 2세를 출산할 때 당시 매우 고생한 탓인지 처음부터 별 다른 애정을 두지 않았다.
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공주치고는 보석이나 의상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검소한 생활에 사치와 거리가 멀어 우려와 달리 프랑스의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 어찌되었던 나폴레옹 1세의 입장에서는 귀하게 얻은 아들인 데다 처음에는 아내 마리의 냉대로 인한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에 항상 아들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마리는 시간이 지나 차츰 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잠시 모성애를 느끼는 듯했지만 워낙 아기를 다룰 줄 몰라 결국 나폴레옹 2세는 실질적으로 몽테스큐 부인에게 맡겨져 성장하게 된다.
나폴레옹 1세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후 유럽 연합군은 파리로 진군하고 있었는데 마리 왕후와 나폴레옹 2세가 파리에 머무를지 말지에 대한 대신간의 논의 끝에 파리에 머물러 남편 대신 섭정하는 걸로 결론이 났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블루아 성으로 이동했다. 며칠 후 나폴레옹이 튈트리 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돌아가려고 했으나 주위의 설득에 만남을 포기하고 아버지 프란츠 2세에게 남편과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즉위에 대한 보호와 아들의 로마왕으로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나 남편을 구제하려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자를 지칭하는 인물을 통해 아들과 같이 강제로 랑부예로 보내졌고,그 곳에서 프란츠 2세를 만나 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녀는 돌아가서도 아버지인 프란츠 2세와 대신들에게 나폴레옹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당시 프랑스와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컸던 오스트리아에서 그녀의 노력이 통할리는 없었다. 프란츠 2세는 오히려 나폴레옹에 대한 마리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소개해주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나폴레옹 2세를 잠시 궐에 두고 잠시 엑스레뱅 온천에서 머물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온천에 갔다 나이페르크 백작과 우연히 만났고 결국 그의 노력과 아버지의 계략에 힘입어 마리는 나폴레옹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
얼마 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 후 마리에게 돌아오라고 여러번의 편지를 보냈으나 아마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빠진 마리는 거부하고 아들도 버리고 얼마 후 파르마 대공으로 임명되자 나이페르크와 함께 파르마로 떠나버렸다. 결국 나폴레옹 2세는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은 채 궁궐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다.
얼마 후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고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떠나자 프랑스 정부는 6월 22자로 칙령을 내려 이미 로마왕으로 있었던 샤를을 나폴레옹 2세로 선포하여 재위를 승계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마쳤지만 곧이어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 후 루이 18세를 추대하면서 불과 15일의 재위기간 동안 황좌에 앉아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물러나게 된다.
외조부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2세에게 라이히슈타트라는 공작의 지위를 내리면서 풀 네임 중에 나폴레옹을 빼버리고 프란츠라는 새로운 이름을 넣었다. 프란츠 2세는 메테르니히를 통해 나폴레옹 2세에게 아버지와 프랑스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는 작업에 돌입했는데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에게 철저히 독일식 주입교육을 시켰다.
나폴레옹 2세는 메테르니히를 통해 철저하게 독일식 주입교육을 받으면서 프랑스와 연관된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었고 특히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빈 궁정을 통해 아버지의 소식도 간간히 들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키워갔다. 특히 어머니도 많이 그리워해서 1년 만에 만날 약속을 갖기로 약속까지 하였으나 당시 마리가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을 출산하는 바람에 무산되어 1년 후인 1818년 7월에 단 한 번만 만났는데 이 만남이 두 모자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외롭게 지내던 어느날 궁정 무도회에서 우연히 만난 바이에른의 공주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비인 조피를 만났는데, 6살 연상인 그녀를 통해 나폴레옹 2세는 점차 활력을 찾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프란츠 2세의 둘째 아들인 프란츠 카를 대공이었고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를 낳았다. 사실 조피는 아버지의 욕심에 마음에 없는 정략결혼을 한 상태라 심신이 외로운 상태였고 더군다나 자신의 친언니가 나폴레옹 1세의 전부인인 조세핀의 아들 외젠과 결혼하였기에 항상 나폴레옹 2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궁정 생활에서 외롭고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던 나폴레옹 2세에게 조피는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위협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에게서 그를 지켜주기도 했다. 둘은 서로를 통해 궁궐에서의 답답함을 자주 토로하면서 점차 가까워졌으며 소문이 퍼지자 궁정에서는 둘이 불륜의 관계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나폴레옹 2세는 점차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 명석하였고 꽤 잘생긴 외모를 가져 귀족들로부터 인기를 받았다. 특히 프란츠 2세는 그의 영특한 재능을 좋아하였고 크게 총애하였다. 그러나 메테르니히의 강압식 교육에 지친 그는 결국 우울증에 달렸으며 그럴 때마다 조피와 함께 같이 지내면서 많이 위로를 받았다. 조피를 통해 그는 아버지와 프랑스에 대한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며 메테르니히 몰래 프랑스와 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17살이 되던 해에 그는 티롤 연대의 대위로 입대하여 청년 장교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했었고 어느 정도 청년 장교로 명성도 쌓고 있고 있었고 조피와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2년 후인 19세에 프랑스에서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폐위되자 프랑스 내에서는 나폴레옹 2세를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잠시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조피가 둘째를 임신하면서 나폴에옹 2세의 아이라는 거짓 소문이 펴져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교로 보직하면서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고질적인 폐렴에 시달려 결국 투병에 이르렀고, 그때마다 조피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자주 찾아와 그를 간호하였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21세인 1832년 7월 22일 사망한다. 조피는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며 그가 죽자 더는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자 곧바로 어머니인 마리에게 전달되었으며 마리는 아들의 죽음을 그의 친할머니이자 나폴레옹 1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레티치아에게 편지를 보내 알려줬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합스부르크 왕가 전용 묘지에 뭍혔으나 훗날 나폴레옹을 동경하던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 후 그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에 이장하여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잠들었다. (히틀러가 좋은 일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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