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의 비하인드 러브 스토리

patrica1977 2024. 5. 17. 21:44
반응형

[출처 : 직접 작성 + 인터넷 검색]

 

넬슨제독의 초상화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 영국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는 넬슨제독은 현재까지도 영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들 알겠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여 프랑스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전역은 나폴레옹에 의해 지배되던 시기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활약이 없었다면 당시 육군이 약했던 영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은 최고의 정예군대였고 대프랑스 육군만 해도 총 160만명에 이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프랑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런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넬슨 제독은 지금까지도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이라도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넬슨이 본처를 버리고 빠져든 여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엠마 헤밀턴(Emma Hamilton) 이라는 여인이다.

 

엠마 해밀턴의 초상화

 

엠마 헤밀턴은 영국 출신의 빼어난 외모로 알려진 유명한 여성으로 1765년 4월 26일에 영국 체셔주의 네스턴에서 대장장이였던 헨리 라이언의 딸로 태어났다.그녀는 가난하게 성장하였지만 12살때 런던으로 이주하여 파출부로 일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연극극단 단원으로 잠시 활동하게 되는데 그녀의 뛰어난 외모의 영향이 컸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녀의 외모에 마음을 뺐긴 여러 남자들과 교제하던 중 교제한 남자 중의 하나였던 찰스 그레빌의 정부가 되어 살면서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조지 롬니를 소개받게 된다. 당시 조지 롬니는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 중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자마자 매혹적인 몸매와 외모에  끌려 그녀를 모델로 삼아 나체 그림을 비롯한 다양한 그림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 덕분에 그녀는 런던의 유명 인사가 되어 각종 사교계에 초대받았고 점점 인지도를 쌓게 된다.

 

엠마의 대표 초상화
엠마의 대표 초상화

 

 

그녀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들도 그녀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내놓으면서 그녀의 인기는 바다건너 프랑스 파리까지 전해질 정도로 그녀의 명성은 더 높아진다.

 

그녀의 모든 수입은 찰스가 가져갔는데 그녀가 막대한 수입을 벌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모은 돈을 비롯한 전 재산을 탕진한 그는 돈 많은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외삼촌인 해밀턴(당시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관)에게 팔아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채 찰스를 따라 런던에 갔다가 비오는 어느 날 혼자 하이드 파크 공원을 걷던 중 우연히 첫 사랑과 재회하게 된다. 그 때 재회 하는 장면을 지나가던 넬슨 제독이 목격하게 된다. 

 

넬슨은 그녀의 관능미한 놰쇄적인 모습에 반했고 본인도 모르게 그들의 은밀한 장소를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은밀한 장소에서 계속 기다리다 첫 사랑이 먼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넬슨은 용기내어 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러냈지만, 엠마는 넬슨을 보자마자 냉대하였다. 

 

당시 넬슨은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영국에서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엠마도 그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명인사인 자신을 냉대한 엠마에게 자존심이 상한 넬슨은 좀 더 저돌적으로 나가 결국 그녀와 하룻밤을 가졌고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엠마는 얼마 후 찰스는 잠시 영국에 귀국했던 삼촌 헤밀턴에게 엠마를 팔아버렸고 그녀는 결국 나폴리로 떠나게 된다.

 

 

나폴리에 자리잡은 엠마는 타고난 외모와 끼로 곧바로 나폴리의 사교계를 장악했고 왕비였던 마리아 카롤리아와도 친분을 맺을 정도로 그녀의는 나폴리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마리아 카롤리아의 친동생이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이기도 하다. 해밀턴은 외교관의 직책이었으나 고고학자이자 화산학자로 활동하면서 영국으로부터 최고의 과학업적상으로 수상하기도 했던 유명 인물이었다. 비록 해밀턴 조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려왔지만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대했으며 7년 후에는 영국 국왕의 허락 하에 해밀턴의 정부에서 정실 부인이 되었다. 그때 해밀턴의 나이는 60세, 엠마는 26살이었다.

 

사실 엠마는 넬슨과 첫 만남 이후부터 그와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러던 1798년 9월 22일, 나일 해전에서 승리한 넬슨이 그녀를 보기 위해 나폴리에 잠시 들렀다. 당시 넬슨은 해전으로 인해 심하게 부상을 당한 상태였지만 엠마를 보기 위해 나폴리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엠마는 넬슨을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왔고 이미 넬슨의 전직 상사로 친분이 있었던 해밀턴도 넬슨을 반갑게 맞이했다.

 

일주일 후 넬슨의 40세 생일이 되자 해밀턴 부부는 1800명의 하객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동안의 피로에 지친 넬슨은 결국 실신하게 되었고  엠마는 넬슨의 자신의 침실에서 9일 동안 간병하면서 사이는 더더욱 가까워졌다. 얼마 후 넬슨이 회복하자 넬슨의 비서를 자처하며 따라다니면서 통역관, 정치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정부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연예는 당시 전 유럽에 가십거리가 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1799년 프랑스 혁명이 물결이 나폴리에 몰려오자 나폴리에서 반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카롤리나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은 시칠리아로 피신하였으나 왕당파와 친분이 있던 엠마는 넬슨을 통해 왕당파의 반란 진압에 성공시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년 후에는 남편 해밀턴이 대사관직을 사임하고 엠마, 넬슨과 같이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그 당시 엠마는 이미 넬슨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엠마는 유부녀의 신분임에도 넬슨과 동거하는 불륜을 저지르는 셈이었고 넬슨 역시 본처가 따로 있었기에 유부남과 유부녀의 동거는 누가 봐도 화제거리이자 비난거리가 되기 마련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불륜에 대해 무관심했다. 더 아리러니 한건 남편인 해밀턴 역시 나폴리 시절부터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되지만 알면서도 두 사람과의 관계에 오히려 응원하는데, 아무래도 나이 차가 있는 자신보다 젊은 넬슨과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넬슨의 부인이었던 프란시스 니스베트로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였고 넬슨과 함께 살면서 아내로서의 역할과 도리에 충실할 정도로 영국 국민들에게도 알려져있었다. 사실 넬슨은 젊은 시절 당시 삼촌의 소개와 간곡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아내와 결혼하였기에 애초부터 애정이 전혀 없었다. 애정없는 부부관계를 유지하다 엠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거였고 영국에 돌아오자마자 아내와의 이혼을 감행하면서 한동안 영국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얻기도 하였다. 곧이어 엠마가 딸을 출산하면서부터 넬슨은 본처와는 일방적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렸고 엠마의 남편인 해밀턴마저 죽자 본격적으로 대놓고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1805년이 되자 트라팔가르 해전 준비를 위해 엠마의 곁을 떠났고, 얼마 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딸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의 편지를 엠마에게 전달해준다. 아마도 이번 전쟁으로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한 듯 싶다. 그러나 사실 넬슨은 전투 이후 엠마와 정식으로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편지를 보낸지 2일 후엔 1805년 10월 21일, 결국 넬슨은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된다.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브랜디에 몰약과 장뇌를 넣어 빅토리 호에 실려 아까운 지브롤터로 옮겨졌다가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5주 만에 영국에 도착하였다. 넬슨의 장레식은 1806년 1월 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 1만명의 수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평소에 넬슨의 원하던 대로 나일 해전에서 격침한 나폴레옹의 기함인 오리앙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넣어 안장되었다.

엠마는 이미 2년 전인 1803년 4월에 남편 해밀턴의 죽음을 겪었고 곧이어 넬슨마저 죽자 슬픔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냈으며, 넬슨의 장례식 참가 허락 조차 받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친어머니 마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그녀는 한동안 비참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나 넬슨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모든 재산과 부는 그의 형인 윌리엄 넬슨에게 돌아갔으며, 윌리엄은 유언 내용을 알면서도 엠마가 불륜녀라는 이유로 그녀와 딸인 호레이샤를 문전박대하였고, 그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넬슨의 본처 프란시스 니스베트로에게도 온갖 멸시와 푸대접을 받았다.

남편 해밀턴이 죽을 당시 유산 관리인이 조카이자 엠마의 전 연인이었던 찰스였는데 찰스는 엠마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도와주지도 않았고, 엠마는 품위 유지비를 위해 사치를 일삼다가 결국 기하급수적으로 빚이 늘어난다. 사실 물려받은 유산은 거의 없었으나 남편 해밀턴과 넬슨 생존 당시에 그들이 엠마에게 준 재물 액수는 유산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과소비와 도벽으로 인해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녀는 넬슨과 동거하면서 그의 조카들도 모두 도맡아 키웠는데 넬슨이 죽자 조카들을 비롯한 넬슨의 가족들이 돌변하여 그녀의 모든 재산을 가져가다시피했다.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1811년부터 1812년까지 딸과 같이 가택연금 상태로 수감되기도 하였다. 수감생활이 끝나자 그녀를 후원했던 조지4세를 비롯한 수 많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넬슨의 유품과 자신의 유품을 경매로 내놓으면서까지 빚을 갚아나갔다. 그렇지만 사치를 여전히 못버렸고 결국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1814년 딸과 함께 프랑스 칼레로  도망갔다.

 

그러나 칼레에서도 유명세를 이용해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사치를 즐기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음주와 이질 증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더욱 독한 술과 아편을 복용했다. 결국 몸을 상해 결국 칼레에 온지 6개월 후인 1815년 1월, 49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된다.

넬슨과 엠마의 딸인 호레시아는 엠마가 죽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넬슨의 누나들의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넬슨의 양녀로 키웠다. 고모들은 자신들이 엠마에게 모질게 대했던 죄책감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호레시아에게 만큼은 애정을 주고 잘 잘 키워줬다. 

 

고모들의 보호아래 성장하던 호레시아는 7년 후 북노포크 교구의 목사인 필립 워드와 결혼하였고 7남 3녀의 자녀를 낳으면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 호레이샤는 1845년 전기 작가인 니콜라스 해리스 경에 의해 아버지가 넬슨임을 뒤늦게 알았으나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친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넬슨이 입양한 양녀인 자신의 보호자였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14살 때까지 엠마와 같이 살았다는 걸 고려한다면, 어머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 그걸 피하기 위해서 부인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들이 많다.

 

호레시야의 외모는 외모 자체만으로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절세 미인으로 알려진 어머니에 비해 그녀의 외모는 아버지인 넬슨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외모 자체는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외모에 비해 너무 떨어지다보니 외모 자체만으로 오랫동안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호레이샤가 죽자 그녀의 비문에는 "넬슨 제독의 사랑하는 딸이며 필립 워드 목사의 미망인 호레시야 넬슨, 1881년 3월 6일 80세로 여기 잠들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