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작성 + 인터넷 검색 사진]
프랑스의 북쪽 영토에는 칼레(Calais)라는 항구 도시가 있다. 현재 칼레는 난민사태로 인해 현재 각종 매스컴에서 주목받는 도시이다. 난민들이 칼레로 몰리는 이유가 있는데 영국과 유럽대륙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칼레는 영국대륙과 유럽대륙을 이어주는 도시로서 영국과 가장 가까운 있는 유럽대륙에 위치하고 있다.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지방의 파드칼레 주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약 14만 명이다.
칼레는 영국과 불과 34km밖에 안 되는 도시로서, 이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중세시대에는 양모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가는 항구도시로 매우 중요한 입지에 있었다.
그렇지만 50km에 이르는 채널터널이 개통된 이후로 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은 많이 상실되었고 현재는 레이스 등의 수공예품, 금속, 조선 공업등이 성하고 있다. 특히 채널터널은 현재 난민들의 집합소가 되고 있다.
칼레는 프랑스 북쪽 지방에 있어 프랑스 영토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211년 동안(1347~1558)은 영국영토였다. 한동안 영국영토였던 계기는 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졌던 100년 전쟁(잔다르크가 활약)이 발단이 되었다.
100년 전쟁은 유럽 역사에 가장 중요한 전쟁으로서, 100년 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 영토 내에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국 공주가 프랑스 영주와 결혼하게 되어 낳은 아들이 영국 왕이 되자 자연스럽게 영국왕이 아버지였던 프랑스 영주 영토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프랑스 영주와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영국은 프랑스 내에 많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더군다나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왕비였던 엘레오노르와 이혼을 하는데, 당시 영국왕이었던 헨리 2세는 10살 연상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엘레오노르 소유였던 남프랑스의 엄청난 영토를 영국 영토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의 슬하에 5남 2녀를 낳았으며 그 중에 장남이 사자왕으로 불리던 리처드 1세 그리고 마그나카르타 사건으로 알려진 존왕이 유명하다. 추후 엘레오노르는 헨리2세와 파혼하고 한때 남편인 헨리 2세에 의해 유폐까지 당했지만 그가 죽자 아들인 리처드 1세가 해방시켜 주었으며, 3차 십자군 전쟁 때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영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유럽 최고의 상속녀였으며 루이 7세, 헨리 2세와 차례로 결혼하는 등 중세시대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로 최고의 가문이었던 아키텐 공작인 기욤 10세와부인인 아예노르 드 로슈코프의 딸로 태어나 빼어난 외모로 수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루이 7세와 헨리 2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추후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영토를 포함한 수많은 남프랑스 내의 영토를 남편인 헨리 2세에게 바쳤다.
(100년 전쟁 이전에는 영국과 프랑스는 현재처럼 영토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프랑스 내 영국영토가 있었다.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인하여 헨리 2세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프랑스보다 더 많은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헨리2세 아들 존왕에 이르어서야 프랑스는 보르도을 제외한 전 지역(하단에 있는 100년 전쟁 지도 이미지에서 백년전쟁 발발당시 영국령 표시임)을 전쟁으로 되찾았다.)
영국왕은 프랑스 영주를 겸하게 되었고 프랑스 영주는 프랑스 왕과 군신관계였기 때문에 결국 영국 왕은 프랑스 왕에게는 신하가 되는 관계였던 것이다.
영국 왕들은 매년마다 신하로서 프랑스 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했으며 비록 신하였지만 영국에서는 왕이었기 때문에 서서히 프랑스 왕에게 불만이 쌓여갔고 프랑스 왕도 자신의 영토 내에 신하인 영국왕의 영토가 넓혀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의 영토였던 플란더즈 지방(현재 네덜란드)의 영주권을 두고 플란더즈지방을 포함하여 추후 유럽대륙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왕의 관계로서의 바람이 겹쳐져 프랑스 왕에게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는 트집을 잡아 결국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바로 10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왕위계승권이란,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죽으면 그 외종질인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삼촌의 왕위를 계승해서 프랑스 국왕이 되어야 하는데 사촌(숙부의 아들)인 발루아의 필리프가 프랑스의 필리프 6세로 즉위했는데 이에 반발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것이 백년전쟁의 터진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100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었으며, 116년 동안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였다. 100년 전쟁으로 인하여 영국과 프랑스와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그 후 두 나라는 식민지 싸움에도 치열한 전투를 하였고,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했을 때에도 프랑스는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자금을 마련하다 보니 결국 국가재정이 파탄 나게 되어 추후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영국도 프랑스가 나서는 전투마다 항상 프랑스 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두 나라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려 500년 이상 계속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1337년 100년 전쟁이 일어나고 1347년 영국이 칼레를 점령하자 칼레 시민 대표가 에드워드에게 칼레성의 열쇠를 건네는 장면, 이후로 칼레는 1558년 초까지 211년 동안 영국의 영토가 된다.)
당시 영국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고 프랑스 인구는 이미 1000만 명이었지만 영국은 신무기인 장궁을 앞세워 프랑스 군대를 계속 격파하여 한때는 프랑스 수도인 파리까지 점령하는 등 프랑스 영토 거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프랑스는 완전히 멸망하는 위기까지 처해졌다.
그렇지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영국이 점점 불리해지는데, 잔다르크와 뒤 게끌랭이라는 유명한 장군의 등장과 프랑스 국민들의 단결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당시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어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스위스 직업군인들의 활약을 앞세워 결국 지루했던 116년 동안의 전쟁은 결국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추후 프랑스가 유럽대륙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되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100년 전쟁이었다.
패전국인 영국은 프랑스 영토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는데 간신히 건진 도시가 바로 프랑스의 칼레항구였다. 프랑스는 100년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지만 칼레항구 만은 되찾지 않았다, 그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인하여 피해가 심했을뿐더러 당시 국왕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전쟁보다는 왕권강화에 주력하여 칼레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칼레항구는 영국의 중요 항구도시로서 200년 넘게 번영하게 되었고, 영국무역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1558년 영국은 프랑스에 결국 칼레항구를 빼앗기게 되는데 당시 영국의 통치자는 메리 1세였다. 동화 '왕자와 거지'의 실존모델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젊은 나이에 죽자 다음 계승자는 메리 1세였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캐더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이혼당하자 스페인에서 자랐으며, 에드워드 6세가 죽고 영국에서 에드워드 6세의 사촌이었던 제인 그레이를 왕으로 추대하자 스페인은 영국에 함대를 보내 제인 그레이를 9일 만에 여왕의 자리에서 끌어내고 메리 공주를 메리 1세로 추대하였다.
(메리 1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 모국인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였고 유년시절을 스페인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녀는 영국 여왕이 되자, 이미 아버지인 헨리 8세에 의해 신교로 개종한 영국 국회의원과 국민들을 가톨릭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였다. (헨리 8세가 캐더린과 이혼하고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의 결혼허락을 교황이 가톨릭교도는 이혼을 허락되지 않는다고 거절하자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 국교를 신교로 개종함))
여왕이 된 메리 1세는 미혼을 고수했지만 영국과의 친선을 위해 정략결혼을 요청한 펠리페 2세의 잘생긴 외모에 첫눈에 반해 영국의회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사형을 시키는 만행까지 보이며 결국 펠리페 2세와 결혼을 강행하였다. 그렇지만 펠리페 2세는 고모뻘 되는 메리 1세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뿐더러 본국인 스페인에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메리 1세는 미남왕이었던 펠리페2세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으며, 남편의 종교인 카톨릭을 더더욱 신봉하였고 결국 남편의 종교인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수만명에 이르는 영국국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고 처형하고 심지어는 화형까지 시키는 엽기적인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때부터 메리1세는 "피의 메리" (영어로는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메리 1세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지 얼마 후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 전쟁준비를 위해 영국의 지원을 받고자 런던에 방문하여 영국과 동맹을 요청하자 영국의회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극구 반대했다. 그렇지만 메리 1세는 남편인 펠리페의 마음을 얻고자 결국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무리하게 전쟁자금을 끌어모았다.
그렇지만 200여 년 동안 칼레항구만을 되찾기만을 바랬던 프랑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총사령관인 프랑수아 드 로렌에게 명하여 1558년 1월 7일, 칼레항구를 집중 공격하였고 결국 6일 만에 칼레항구를 함락시켜 211년 만에 칼레를 되찾게 된다. 당시 영국은 성벽의 보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식량, 화약 같은 군수품도 충분하였을뿐더러 대포도 3백 문 이상 배치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영국은 국내 정세 사정으로 칼레에 2500명 만의 군사가 주둔했었고, 프랑스는 3만 명에 가까운 군사로 칼레 항구를 공격하였고 결국 당시 영국 사령관이었던 토머스 웬트워스는 군사적으로 10배 정도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하였다.
칼레를 점령한 프랑수아 드 로렌 사령관은 영국 군대가 남기고 간 3만 군대가 석 달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함께 3백 문의 대포를 확보하였을뿐더러 영국 사령관 토머스 웬트워스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바로 칼레 주변의 작은 마을들까지 전부 점령하여 프랑스 땅에서 영국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칼레항구를 되찾은 프랑스는 축제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앙리 2세는 곧바로 전국의 전국의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칼레를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영토로 만들었다.
영국이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였지만 칼레는 한때 100년 전쟁 시대에 이룩했던 영국의 흔적이다는 점, 그리고 무역해상도시로서 큰 이점을 누렸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영국으로는 칼레를 빼앗겼다는 것에 큰 충격이었다. 토머스 웬트워스 영국사령관은 프랑스에 1년가량 포로로 있다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오히려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히는 수모를 겪는다, 그렇지만 무죄가 인정되어 곧바로 석방되었고 26년 뒤인 1584년에 죽는다. 칼레가 함락되었을 당시 메리 1세는 이미 국민들부터 신망을 잃은 상태였을뿐더러 더군다나 화병과 정신분열증으로 누워있는 상태였는데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만일 내가 죽어서 시신이 해부된다면, 그대들은 내 심장에 펠리페. 그리고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펠리페 2세에 대한 집착이 화병과 정신분열증세로 발전하여 결국 재위 3년 만에 사망하였다. 추후 칼레 항구는 추후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고 그녀의 옹호를 받은 드레이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유명한 장소가 되어 영국의 쓰라린 기억을 잊혀주는 결정적인 장소가 된다. 칼레를 빼앗긴 영국은 추후 지브롤터라는 유럽대륙의 영토를 얻게 되어 대영제국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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