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과 결혼하신 이모집에서 살다 7살 부모님 손에 이끌려 한국에 왔다. 그때는 어릴 때라 아무 것도 모르고 부모님을 따라서 한국에 왔는데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언어도... 문화도... 사람들도... 모든 것들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한 순간에 바뀌어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1년 후에 바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에는 미국인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학교로 보내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부모님 덕분에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40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한국인이 되었고 영어도 완전히 잊어버렸으니까...
시민권을 포기한 것도 전혀 내 의사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남자는 군대를 꼭 가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강요와 그 당시에는 시민권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시민권도 포기당했다. 이때까지 살면서 크게 후회한 일은 거의 없는데 한국에 온 것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후회다.
한국에 와서 내 일이 잘 풀렸으면 모를까... 중학교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집안은 완전히 망해버렸고 어머니는 생전 고생안하시다 미싱도 하시고 그 외 돈이 되는 부업이라는 부업은 안해보신게 없을 정도로 정말 고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인문계에 갈 수 있었던 길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워 하루빨리 취업하여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공업고등학교, 지금의 특성화고로 입학하였다.
나름대로 기술을 익히려고 노력했으나 적성에 도저히 맞지 않았고, 그나마 3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기술 덕분에 아버지 친척 분이 대표로 계신 회사(코스닥 상장 기업)에 전공을 맞춰 2년 동안 선반, 밀링을 하면서 첫 직장 일을 시작했다. 이 때가 19살 때이다. 그렇게 살다 30년 동안 직업이 여러번 바뀌는 과정을 거쳤고 지금은 평생교육사라는 직업으로 살면서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직업이 여러번 바뀌는 과정에서 험란한 인생을 겪었고 삶의 지혜도 키우면서 사람 보는 눈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험란한 인생을 살다보니 결혼할 시기를 놓쳤다. 아니... 이성을 만나고 싶어도 정말 여건이 될 수 없었다. 내 몸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 시기가 너무 많았으니까...
그러나 30대 후반에 내 집에 우연히 방문한 경찰에 의해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반전이 생겼다. 맨 처음에 경찰이 내 집에 왔을 때에는 내가 무슨 잘못한게 있나 싶었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는 말에 같이 가줄 수 있냐는 말에 경찰서에 갔고 초면인 20대 초반의 남성이 있었다. 그 남자는 내게 정중히 인사하더니 미국인 친구가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 하면서 찿다 찾다 친척인 경찰을 통해서 나를 찿게 되었다고 하면서 내가 친아버지가 맞는지 나에게 유전자 검사를 해줄 수 있는지 제의했다. 총각인 나에게 뜬금없이 유전자 검사라는 말도 황당했고 사람을 잘못알고 연락한게 아니냐고 했지만 자초지종을 듣고나서는 더더욱 할 이유도 마음도 전혀 없었기에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인 친구 사진 몇장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했고 사진을 보는 순간 웬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 않은 얼굴이라고 할까...
일단 나는 사진과 그 학생의 연락처를 받아왔고 한동안 사진을 보고 또 다시 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솔직히 내가 유전자 검사를 왜 해야 하는지 할 이유도 영문도 전혀 몰라 사진을 찢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분명히 처음보는 얼굴인데 아무리봐도 웬지 낯설지 않았다.
그때 당시는 정말 오래 고민했던거 같다. 한편으로는 이런 일 가지고 고민할 필요도 못 느꼈고 내가 아닌게 확실한데 상대방도 내 연락을 애타게 기다릴 수도 있으니 하루 빨리 아니다는 것을 증명해줘 빨리 나에게 기대와 미련을 버리고 아버지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게 맞겠다 싶어 청년에게 연락해 내 머리카락과 칫솔을 전달해줬다. 그렇게 두 달 후 그 청년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그 청년이 준 건 유전자 검사 결과지였고 그 결과지에는 친자확률 99.7%.. 정확한 수치가 아직도 기억난다.
사실 이때 나는 검사결과지를 보고 믿기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 살면서 결혼도 연애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던 내가 무슨 20살 넘은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무슨 헛소리가 아닌가 싶은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혹시 유전자 검사지 조작을 통한 신종 사기인 걸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진도 합성이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대놓고 사기치냐고 언성을 높였고 자리를 뜰려고 했는데 사진 속의 친구와 만남을 주선해주겠다고 내 친한 친구라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다고 믿어달라고 했다. 방학때 한국에 올거니까 그 때 만나줄 수 있냐고 한 번 만나만 봐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길래 우선 알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몇 개월 후... 그 청년에게 다시 연락왔고 나는 정말 나가기 싫었고 사기치는 거 같다는 의심이 들어 집 근처로 온다고 하길래 일부러 약간 거리가 있는 곳이 집이라고 알려주고 거기로 오라고 했다. 근처 카페에서 그 청년과 함께 있는 사진 속의 청년과 대면했는데 실물이 상당히 나았고 좋은 느낌을 받았다. 키도 크고 인물이 워낙 훤칠해서 당시 카페에 있던 여성들도 계속 쳐다볼 정도였으니... 그 청년은 한국말을 잘 못하는 거 같아서 처음 만났던 청년이 중간에서 통역해주면서 대화할 수 있었는데 사실 나도 나지만 오히려 그 청년도 내가 자기 아버지인지 믿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들 알겠지만 외국인 시각으로는 대체로 동양인들이 10년 정도 젊어보이는데다 개인적으로도 워낙 동안이라 제 나이로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그 청년도 내가 몇 살 많은 형 정도로 밖에 안보인다고 했느니 그 심정은 알 것도 같다. 내 나이를 밝히자 둘다 엄청 놀랄 정도였으니까...
유전자 검사결과지는 절대로 조작이 아니라고 들었지만 나는 계속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청년의 실물을 내 눈앞에서 볼 수록 낯설지 않아 정확한 검사를 다시 받아보자고 제의했고, 가장 확실한 피로 재검사를 하기로 하여 유전자 검사기관 3곳을 더 선정해서 모두 직접 방문해서 검사의뢰를 하였다. 돈은 그 청년들이 부담한다고 하니 나는 손해볼게 없었다. 그렇게 사진속의 청년과 어색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검사결과는 상당히 빨리 나왔다. 한두달 걸리는 줄 알았는데... 청년들과 같이 검사센터로 갔고 직원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생전 관심도 없던 유전자학 강의도 잠시 들었고... 역시나 세 곳 모두 친자확인 성립된다는 결과를 듣는 순간... 나도 사진 속의 청년도 우리는 서로를 한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세 곳의 검사센터에서 모두 직접 체혈한 혈액으로 검사해서 모두 친자관계로 확인되었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청년의 어머니가 누군지 나도 아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사진을 볼 수 있냐고 해서 보여줬는데 전혀 모르는 여자였다. 기억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현실 자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고 기가 막히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그 청년은 사진 몇장을 더 보여줬는데 아기 시절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 중 한 장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옛날 사진 중 한장에서 먼발치에 낮익은 사람이 찍혀있었고 자세히 보니까 분명히 내 친구였다. 사진에 찍힌 친구를 보는 순간 잊혀진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한국에 온 이후 어린 시절 친구 중에서 한 명과 계속 연락이 닿았고 나중에는 이메일로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내가 20살 쯤에 그 친구가 여친하고 같이 한국 여행온다고 해서 같이 만났었고 셋이서 같이 술을 먹은 뒤로 그 날의 기억이 완전히 끊겼었다. 아무래도 기억이 끊겼을 때 친구의 여친과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으니까...
그 때 며칠 있다 둘은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몇 년 뒤에 친구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친구의 여자친구에게도 그 어떤 연락도 받은 적도 없었다. 아마 친구가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는 최소한 알거 같은데 왜 나한테 연락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진작에 연락했다면 내가 키웠을 텐데... 엄마 사진이라고 보여준 사진은 당연히 늙었을 때 찍은 사진이니 내가 모를 수 밖에... 나중에 알고보니 내 아들 버리고 새출발해서 잘 살다 죽기 전에 아들을 보고 싶다고 불러 아버지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하던데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와 그 청년... 아니... 내 아들은 그렇게 재회를 했고 지금까지 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아들은 미국으로 잠시 돌아갔다 한국으로 들어와 내 집에 살면서 어학당에 다니면서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고 나는 아들과 친해지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아들도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점차 나를 많이 따랐고 그 모습이 기특했다. 한국어도 늘면서 서로 못했던 대화도 자주 하면서 점차 가까워졌다. 사실 아들과 같이 지내면서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고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도 내가 아빠니까 먼저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고 나도 아들도 처음에는 둘다 어색했지만 시간이 약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서히 좋아졌고, 특히 아들과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많이 친해졌다. 여행만큼 아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
오래전부터 만약에 내가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이쁜 아기 낳고 아기 재롱보는 상상만 했었는데, 갑자기 다 큰 20대 청년이 내 앞에 나타나서 아들이라고 하니 그 모든 상상과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나보다 키도 큰 듬직한 청년 아들이 있다는게 솔직히 지금 아들과 만난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적응이 안되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들이 미국에서 부모님 없이 친척집에서 거의 혼자 외롭게 자랐다는 걸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고 그동안 내 아들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는것이 한편으로는 정말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를 어떻게 알고 찾은 건지 정말 신기하기도 하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더더욱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고 싶어 한국에서 같이 사는 동안 아들과 친구처럼 자주 여행도 다니면서 많이 친해졌고 점차 아들도 나에게 마음을 열고 나를 의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사실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씀드릴지가 더 걱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말씀드리기보다 아들과 서로 어느정도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 뒤에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동안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나고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부모님은 충격도 상당히 컸고 모두 놀라셨지만 지금은 나보다도 내 아들을 더 신주단지 모시듯이 부모님집에 갈 때마다 우리 손자왔냐고 하면서 어여뻐하는 걸 보고 한편으로는 흐믓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뒤로 나는 완전히 찬밥신세라는 거.. ㅋ
아들 덕분에 부모님도 밥먹듯이 말씀하셨던 결혼하라는 잔소리는 완전히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근데 또 너무 안들으니까 서운한 감정은 뭔지 모르겠다.친구나 지인들도 처음에는 모두 안 믿거나 농담, 장난으로 받아들였는데 아들이 나이들수록 하나같이 점점 나를 닮아간다는 말들을 하는 거 보면 진짜 내 아들이 맞는거 같다 ㅎㅎ 지금은 같이 걷다보면 주위에서 게이커플로 볼 정도로 사이가 너무 좋은 부자관계니까~~ ㅋ
얼마전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왔다. 여친이 임신해서 결혼한다고~~~ㅠㅠ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데, 물론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기쁘기는 하지만 왜 충격과 슬픔이 먼저 다가오는지... 연애는 커녕 결혼 한 번도 못해본 내가 아들의 결혼에 곧있으면 할아버지가 된다는게 먼저 들어오네... 그리고 거의 키운 적도 없었는데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정을 처음 느꼈고 알 것도 같다.
12월에 결혼한다고 하니 ... 아들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며느리될 아가씨 사진도 보니까 이쁘고... 아들이 연결해줘서 화상통화도 두 번 정도 했었는데 착한거 같아서 안심이 되는거 같다. 아들 결혼식에 가면 40년 만에 미국에 가는 거니 감회가 새롭다... 근데 미국에 가도 이런 식으로 가는 건 좀 그런데.. 아들 결혼식 지켜보고 곧 있으면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슬프네 ㅠㅠ 아들 생각하면 이런 생각 가지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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