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명성황후 민씨의 사후 국제 정세와 '민비' 라는 호칭의 변화

patrica1977 2024. 2. 18. 19:46
반응형

[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

 

역대 왕비 중에서 명성황후 민씨처럼 그녀의 호칭에 대해 헷갈려하거나 정확한 호칭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문데, 그 이유는 일제의 만행과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녀는 중전의 신분으로 지내다 일본인에 의해 시해후 이틀 뒤에 고종은 일본의 강압으로  중전의 첩지를 거둬들이고 폐서인으로 강등하게 된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 기사]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 차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8월 23일에는 다시 복위되는데, 신분은 왕비,왕후가 아닌 정1품 '빈'으로 복위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 기사]

 

조령을 내리기를,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빈'으로 올리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하였다.

 

 

명성황후가 죽고 며칠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명성황후가 죽은지 며칠동안 그녀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가 있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8월 22일자로 실록에 기록된 교지는 고종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교지에 반발한 대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교지는 고종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2년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지은 어제행록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명성황후의 암살소식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로 있던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고 일제의 만행을 지탄했다. 그외에 영국, 미국 등에도 일제의 만행이 전해져 일본은 국제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그해 10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위되었지만 2년뒤 대한제국이 반포되기까지 시호없이 유지된다. 2년동안 민씨는 정해진 시호없이 유지되다 그녀의 성씨를 따라 민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조선국민들의 입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명성황후는 시해당한 후 즉시 폐서인 되었다 다음 날 빈으로 승차되었다가 2개월 후 왕후로 복위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종은 왕후의 장례를 치르라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 물론 왕후의 시신도 당시에는 없었다. 아마 당시 고종은 이미 대한제국의 성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외적인 일제의 손에 죽어간 왕후를 장례라도 황후의 예로 치루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러한 고종의 애틋한 마음은 아래의 책봉교서 및 어제행록에 잘 나타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명성황후

국장에 대한 기록에도 많이 언급된다. 비록 나라가 힘이 없어 사랑하는 왕비까지 외적(일제)의 손에 죽어갔지만, 그래도 고종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통하여 당당히 외세와 대등함을 보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국모가 외적(外賊)에게 시해되었지만 조선조정은 장례식도 치루지 못했다. 여하튼 고종은 이렇듯 잔악하게 왕비까지 죽이면서 침략하는 일본이 싫어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약 1년간 지내다 돌아와서는 드디어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을 선포한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그동안 명나라와 청나라의 속국이었으나, 505년 만인 1897년에 드디어 자주국가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고종은 원구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지내며 고하고는 국호를 대한(大韓) 년호를 광무(光武)라 하는 초대황제위에 즉위한 것이었다.

 

비록 스러져가는 힘없는 나라였지만 스스로 황제국임을 선포했다는 것은 ‘우리는 러시아/청나라/일본과 대등하다’는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아주 뜻깊은 것이었다. 별다른 시호없이 세상을 떠난 왕비 민씨는 이때 비로소 명성황후로 봉해지고, 드디어 국장이 치러진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대한제국의 성립과 명성황후 책봉 기록이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1897년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2일(양력) ]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열두 무늬 곤룡포와 면류관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1월 6일(양력) ]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리기를, “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비(皇妃)가 도와준 성과이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 조선왕조실록 고종 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1월 22일(양력) ]

 

“짐이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외국 군사를 몰래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대를 남모르게 사주하여 을미년(1895) 만고천하에 없었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의 곤녕합에서 8월 20일 무자일 묘시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과 황후가 곤녕합 북쪽의 소헌에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 안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 ‘원컨대 종묘사직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위급한 중에도 종묘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는데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萬代)에 훈계로 삼을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와중이라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하였다.

 

 

[ 참고자료2 : 명성태황후의 또 다른 호칭 '민비'에 대한 진실 ]

 

우선 언제부터 민비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생기는데,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뒤 조선왕실의 직위를 현저하게 격하시켰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씨 조선(이조, 李朝)' ,'이왕(李王)', '이태왕(李太王)'이라는 표현으로 고종황제(광무황제) 역시 '덕수궁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으로 격하시켰으며, 명성황후를 '민 덕수궁 이태왕 비(덕수궁 이태왕의 비)'로 격하시켜 사용한 전례가 있는데 "민 덕수궁 이태왕 비"를 줄여 민비로 불리기 시작되었는 말이 있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민비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명성황후는 역대 왕후들과는 달리 사후에 바로 시호가 내려진 것이 아니라, 죽은 날 다음에 바로 폐서인으로 강등된 후 하루만에 다시 빈으로 복위되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반포하기까지 무려 2년이라는 긴 공백동안 왕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이 2년동안 이미 죽은 왕비 민씨를 부를만한 정해놓은 시호가 없다보니 사람들마다 죽은 왕비 민씨를 자신만의 입맛에 맞게 편하게 부르다보니 민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겼을 거라는 것이다.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도 같은 예가 아닌가 싶다. 혜경궁 홍씨도 고종황제에 의해 헌경왕후로 추존되기 전까지에는 혜빈 홍씨, 헤경궁 홍씨로 불렸고 현재도 정식 시호인 헌경왕후보다는 혜경궁 홍씨로 더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우선 ‘민비’는 ‘민씨 성의 왕비’라는 말이다. 조선은 왕국이었기 때문에 왕의 배우자를 ‘비(妃)’로 칭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비와 같은 호칭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임금이나 왕실의 어른이 왕비를 부를 때는 ‘중전’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왕비마마’라고 부를 뿐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민비라는 말을 일본이 우리 왕실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인 가운데도 왕비를 가리켜 민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그 경우에도 민비라는 호칭은 왕비를 부정적으로 여긴 사람들에게서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상대방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조선의 풍습에서 왕비를 일러 민비라고 칭했던 것은 분명 상대방을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비(妃) 라는 명칭은 중국식 호칭 정리가 기본이 된 [당육전]에 의거, 황제의 부인을 후 라고 부르고, 비는 황제의 후궁이나 제후의 부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천하관에서 제후국이었던 조선은 비라는 명칭을 썼고 생전에 비라는 명칭을 썼기 때문에 민비라는 호칭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사후에는 '후'라는 추존호를 썼다, 인현왕후나 원경왕후 같은 왕후를 말한다. 조선은 중국식의 천하관에 속해 있으나 은근히 중국과 거리를 두면서 후라는 칭호를 썼고, 이는 왕의 사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조나 종의 명칭을 썼다. 따라서 정식으로 부르려면 명성태황후 민씨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비라고 한다해도 틀린것이 아닌가라는 데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미 이전 왕후들은 덕비, 정비, 공비 라고 부른 전례가 있다.

 

예를들어 정종의 부인 정안왕후 김씨는 덕비였고 세종의 소현왕후 심씨는 공비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여러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앞에 ~비 라는 명칭을 썼고 이것이 조선 초에도 내려왔지만 엄연히 그냥 성씨를 붙이는게 아니라 따로 호칭을 내려 붙였다.  잘 살펴보면 비라는 명칭은 같으나 앞의 글자는 본인의 성씨를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민비라는 호칭은 역사 교과서에서 자주 나오고 많은 역사학자들도 민비라고 언급할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다.

 

그리고 꼭 민비(閔妃)라는 호칭이 비칭(비하하여 부르는 이름)은 아니라는 증거도 있다. 명성황후 당대에 활동한 대학자 김평묵 같은 이는 그의 책 [중암집]에서 ‘민비’라고 부르고 있다. 김평묵은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을 실현시킨 최익현과 같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로,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친일파와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지만 ‘민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윤호진의 뮤지컬 '명성황후'가 유명해진 후로 명성황후라 부르지 않으면 매국노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다. 국가가 공인한 공식적 최후의 시호인 "명성태황후 민씨" 로 불러주어야 옳다는 말도 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너무나 친숙하게 알고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추후 추존된 ‘장조(莊祖)’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반포하면서 고종으로부터 6대조까지 모두 황제로 추존하게 되면서 6대조까지의 임금은 모두 황제,그리고 황후로 불려야 한다. 신정왕후 같은 경우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가 정식 시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이렇게 옮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번역한 역사학자들도 한글판 실록에는 민비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민비는 사람에 따라 불리는 시각의 차이이지 민비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이거나 폄하하는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연히 "명성태황후 민씨" 라는 시호가 있기 때문에 민비로 불려지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