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직접작성 + 조선왕조실록 ]
사극 "장희빈"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면 숙빈 최씨는 빠지지 않는 단골 후궁이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으로 영조대왕의 생모로 알려져 있고 무수리 출신으로 신데렐라 같은 인생역전을 이룬 인물로 장희빈 사극에는 그녀의 불행한 말년은 잘 암시가 되어 있지 않다.
여러 정사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그녀의 행복은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기 전까지 인 것으로 보인다.
1701년 10월에 희빈 장씨가 죽은 후 3개월 후인 1702년 1월, 숙종은 희빈 장씨를 지지하고 있었던 소론 출신의 전 영의정 서문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고 다시 소론 대신들을 대거 재등용하여 소론 중심의 정국으로 교체하였는데, 서인이 다시 집권한 갑술환국이 벌어진 지 8년 후였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3년상을 마치기 전에는 재혼할 수 없다는 국법을 내세운 노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소론 출신의 새로운 중전을 다시 물색하기 시작했다.
4개월 후인 5월 28일, 정사인 승정원일기 기록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404책 (탈초본 21 책) 숙종 28년 5월 26일 정미 9/13 기사)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행하였는데 이 규모가 워낙 커 말 30 필이 토석을 운반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현궁은 숙빈이 영조를 출산하고 숙종에게 하사 받은 집인데 숙빈궁이라고도 불렸다. 숙빈궁은 하사 받고 계속 방치되다 이때 갑자기 토목공사를 진행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지 숙종의 행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3개월 후 공사가 마무리가 될 때쯤인 9월 3일에는 김주신의 딸을 최종 결정하였고, 10월 3일에는 중전 김씨를 책봉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희빈 장씨가 죽은 후 1년 동안에 있었던 이와 같은 숙종의 행적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숙종은 세자의 보호막 역할을 하던 희빈 장씨를 사사 후 그 역할을 대체할 소론과 남인세력을 다시 키우기 시작하면서 적대세력인 노론을 다시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서인들의 권력의 실세였던 숙빈 최씨를 비롯하여 노론세력을 다시 제거하기 시작했다.
숙종은 숙빈을 내치기 위한 과정에 착수하면서 가장 먼저 희빈 장씨를 사사하기 하루 전에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국법을 공포하였고, 희빈 장씨 사사 후 3년 동안 중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국법을 어기고 소론 집안 출신의 중전을 찾기 시작했고, 다시 3개월 후인 1702년 1월에는 세자를 보호하고 숙빈의 양 날개를 제거할 노론 대신들을 대거 해임하고 소론, 남인 중심의 대신들로 채웠다. 그리고 중전이 입궁 후 숙빈의 조기 출궁을 위해 5월 말부터는 이현궁의 토목공사를 강행하여 자신이 계획한 대로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4개월 후인 9월 3일에는 김주신의 딸을 중전으로 낙점하였고, 10월 3일에는 중전 책봉 전교를 내렸다. 10일 뒤인 10월 13일에는 중전 김씨가 친영례로 입궐하였다.
1년 동안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숙빈 최씨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희빈 장씨가 죽게 되면 다음 중전 후보는 숙빈 자신 아니면 영빈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걸 숙빈과 영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중전 간택은 정치적인 결탁으로 책봉되는 사례도 많아 명문가 출신에 자식이 없었던 적합한 중전감인 영빈 보다 서인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잉군을 낳았던 숙빈이 중전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숙빈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되어 자신이 중전이 되는 것을 막아버리고 노론이라는 양 날개를 제거하는 것도 모자라 이현궁 공사를 서둘러 자신을 출궁 하기에 급급한 숙종의 처신을 지켜보면서 숙종에게 많은 실망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또한 새로운 중전이 입궁하면 자신의 입지마저 줄어들 것이라는 것도 느꼈을 것이다.
중전 김씨가 입궁 후 3일 뒤인 10월 18일에는 내명부 모든 후궁들의 품계가 오르는데, 이런 과정에서 숙빈은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의 전후에 맞춰 이현궁으로 출궁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명확치 않은 것이 숙빈의 출궁 시기인데, 1701년 10월부터 1702년 10월까지의 숙종의 행적을 종합해 본다면 이현궁 보수공사를 시작한 5월 말 당시에는 숙빈이 이현궁으로 나갈 것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중전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숙종이 자신에게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느끼자 숙종에게 출궁을 요청했고, 숙종은 흔쾌히 들어주어 이현궁 보수공사를 서두르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으로 후궁은 국법에 의해 임금이 먼저 죽고 3년 상이 지난 후에 나가거나 폐출 아니면 병환으로 잠시 나갈 수 있었는데, 숙빈은 병환을 핑계로 궁궐을 나간 것으로 보이며 숙종은 내심 반기면서 사저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숙종이 최씨를 아꼈다면 오히려 만류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전 김씨 입궁 후 3일 후인 10월 18일에는 모든 후궁들이 첩지가 올랐는데, 중전이 새로 입궁하면 정1품 이하의 모든 후궁들은 첩지를 올려 받는다는 국법이 있어 오른 것이었지만 숙종은 내명부에서 세력이 커진 숙빈을 제거하고 새로 책봉된 중전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내명부 개편을 목적을 국법이라는 핑계로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역사학자들도 중전 김씨가 입궁 전후를 기점으로 숙빈 최씨가 출궁 한 것으로 판단하는데 1702년 ~ 1704년 사이로 본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숙빈은 이미 이현궁도 완공되었기 때문에 중전 김씨가 책봉된 후 궁궐에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이며, 중전 김씨가 입궁하기 직전이거나 입궁 후 곧바로 출궁 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조가 즉위1년에 지은 "숙빈최씨신도비" 에는 숙빈이 병환을 핑계 삼아 1716년에 나갔다고 전해지는데,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내용이고 영조가 직접 지은 내용이라 조작했다는 정황과 증거가 있다.
숙종 실록에 보면 숙종은 이현궁을 환수 조치하고 연잉군 사저에서 같이 살도록 명한 기록이 있다.
[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 6월 22일 경진 2번째 기사 ]
또 전교하기를, "옛날의 이현궁(梨峴宮)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 주위(周圍)의 넓고 큼이 다른 궁(宮)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연(輦)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未安)하다. 이제는 연잉군(延礽君)의 제택(第宅)으로 이미 정하였으니, 이 집에 동거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러한 뜻으로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사관(史官)은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일은 진실로 궁부(宮府)276) 는 일체(一體)이며 왕이 된 자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을 얻은 처사이며, 또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성상의 마음으로 판단하였으니 더욱 그 성대한 절도(節度)를 볼 수 있다. 다만 내사(內司)는 아직도 아울러 혁파(革罷)함을 아껴 그 선(善)함을 다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이 기록을 보더라도 숙빈이 1711년 6월까지 이현궁에 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이므로, 1716년에 출궁 하여 이현궁으로 갔다는 신도비 기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위 실록의 기록에서 또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 암행을 즐기던 숙종은 숙빈 출궁 후 이현궁을 지나가면서 미안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이현궁에 출입한 적도 없었고 그 흔한 서찰 한 통도 없었다.
그리고 이현궁이 좁으니 더 넓은 연잉군 집으로 옮기라는 내용도 숙빈을 위하는 것처럼 돌려서 기록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숙빈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숙종의 속내는 숙빈이 넓은 이현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 국가차원에서 낭비라는 인식에서 연잉군 저택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당시 숙종은 왕실 재정을 긴축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 중이었는데, 다른 곳이 아닌 숙빈의 거처를 대상으로 하여 재정 긴축의 목적으로 이현궁을 없앴다는 건 숙빈의 위상을 다시 한번 떨어뜨렸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결국 1718년 3월 9일자로 연잉군 사저에서 병사하였는데, 장례에 대한 숙종의 처사도 냉정하였다.
최씨가 죽자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숙종실록 44년 3월 9일)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다.)
또한 그녀의 장지로 거론된 곳이 공주들의 묘역 옆산이라는 이유로 감히 공주들의 묘역인 청룡의 터를 침범하려 했다며 그 말을 전한 내관을 파직할 정도로 화를 내었다. 이 부분을 숙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빈(淑嬪)의 장지를 간심(看審)할 때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범연히 광주(廣州)의 경내에서 묘산(墓山)을 얻었다고 진달(陳達)함으로써 은연중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의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 1번째 기사"
이어 두번째로 거론된 장지에 대해서도 왕실 능 부근은 백성이 장사를 지낼 수 없는데 최 씨를 그곳에 장사 지내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왕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이었던 최 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하고 있는 실록 기록이 있다. 이 부분을 숙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이때 숙빈(淑嬪)의 장지(葬地)를 택하였는데 호상 내사(護喪內使)와 본방(本房)의 직임을 맡은 자들이 처음에는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산(墓山) 근처에 택점(擇占)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명하여 다른 곳으로 바꾸어 정하게 하였다. 또 선릉(宣陵) 18742) 근처로 택점하였는데, 임금이 그곳이 선릉과 서로 바라보는 곳이란 말을 듣고는 예조에 명하여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계달(啓達)하기를, “사성(沙城)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능소(陵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것으로 임금에게 품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사성은 하나인데 전에는 왕후의 능이 바라보였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혈처(穴處)는 한 가지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장사 지내는 것을 금하고 후정(後庭)에 있어서는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조정의 처분(處分)이 심히 공정하지 못하다. 다른 산으로 바꾸어서 택점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 숙종 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 기사
현재 숙빈의 묘역은 숙종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영조(당시 연잉군)가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 목호룡을 대동하고 둘이 직접 고른 곳이다.
그리고 숙종은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숙종의 나이 30세에 겨우 경종을 얻어 어린 경종은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연잉군, 연령군이 차례로 태어나자 경종에 대한 총애도 오래가지 못한다. 희빈 장씨 사후로 경종이 세자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느꼈던 숙종은 결국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과 독대를 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유명한 '정유독대'이다. 숙종에게는 경종이 마음에 떠나고 이미 연잉군이 마음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물론 숙종의 입장에서는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가 죽은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하여 연잉군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숙종의 변덕스러운 면을 또다시 볼 수 있다.
숙종, 경종의 뒤를 이어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천한 무수리의 핏줄이라는 신분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녀 2남 7녀를 모두 명문가로 출궁 시켰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도 당시 명문가 집안의 여식이었다.
영조는 즉위 후 본인이 임금이 된 만큼 어머니인 숙빈 최씨 또한 왕후로 추존하려 했으나, 조정 대신들을 비롯한 노론계 예학자들까지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왕후로 추촌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회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든 것이 1753년에 시행된 궁원제도이다. 궁원제도란, 국왕 사친의 사당과 무덤을 묘묘(廟墓)에서 궁원으로 높여 왕권 왕실의 지위를 안정되게 유지하고자 제정한 제도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의 묘지의 등급을 높여 어머니와 자신의 콤플렉스와 위상을 높이려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무덤에는 등급이 있는데 제일 낮은 '묘', 그다음에는 '원', 그 다음에는 '능(릉)'이었다. 영조는 제일 낮은 어머니의 묘를 원으로 승격 후 점차 어머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우선 즉위 원년에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20년 후인 1744년 3월 7일에는 묘호를 '소령'으로 정한 후 서울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육상묘' 라는 사당을 지었다. 9년 뒤인 1753년 6월에는 궁원제도를 시행하여 어머니의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올리고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또한 사당과 부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는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선왕인 숙종이 국법을 바꾸는 바람에 어머니인 숙빈을 쉽게 왕후로 추존하지 못하고 이렇게 한단계씩 어머니의 존호를 올리는 형식으로 자신의 위로를 달랬으며, 비록 자신의 어머니를 결국 왕후로 추존하는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에 대한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숙빈 최씨의 소령원은 임금의 생모의 묘소가 최초로 원으로 인정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궁원제도를 도입 후 희빈 장씨의 묘소인 대빈묘 역시 원으로 추승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였으나, 영조가 궁원제도를 도입한 진짜 목적은 자신의 어머니의 묘의 등급을 희빈보다 높여 우위에 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궁원제도의 도입 진짜 목적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추존하기 위해서 만든 이름뿐인 제도인 셈이었다. 또한 영조는 희빈 장씨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고 당시 노론으로 구성되었던 조정대신들도 이런 영조의 마음을 굳이 움직일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영조가 한 나라의 임금인 만큼, 정말로 왕실을 생각했고 선왕인 경종과의 우애 그리고 독살설에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대빈묘 역시 원으로 올렸어야 임금다운 처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영조는 한 술 더 떠서 대빈묘의 망주석 위치도 마음대로 바꿔놓았다. 모든 무덤에는 망주석을 두는데 망주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으로 풍수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망주석에 붙어있는 작은 동물조각인 세로가 무덤의 기운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망주석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곡장의 터진 끝부분의 안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조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에 곡장의 터진 부분의 바깥쪽으로 망주석을 옮겨놓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신분 콤플렉스 해소와 어머니의 신분 상승을 위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711년 6월까지 이현궁에 살았던 증거를 완전히 무시하고 1716년까지 궁에서 살다 병으로 나간 후 죽었다고 소령원에 거짓으로 적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 후궁은 죽기 전까지는 출궁할 수 없는 것이 국법이므로 병으로 나가 죽었다는 내용 자체가 거짓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영조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극심하여 숙종에 의한 강제 이현궁 출궁설에 완강히 부정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사관이 적는 실록 기록을 볼 수 없기에 1711년 6월까지 숙빈이 쫓겨난 이현궁에 살았다는 기록을 미쳐 확인할 수 없어 소령원 기록이 조작으로 밝혀질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하나 덧 붙이자면 보통 후궁이 궁에서 나가면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남을 텐데 기록이 전혀 없었던 점으로 보아, 숙종의 암묵적인 교지를 통해 밤늦게 몰래 가마를 타고 이현궁으로 쫒겨나가듯이 출궁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령원에 적은 또 다른 거짓 기록은 숙빈이 7살에 입궁했다는 것이다. 궁녀들이 평균 입궁하는 시기가 7세라는 점을 이용하여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궁하였다고 돌려말해 소령원에 기록하였는데 아직까지 숙빈의 입궁시기와 전직은 그 어느 역사학자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무수리 또는 각심이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무수리나 각심이들은 육체노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힘 좋고 요령 있는 나이 있는 여성들이 주로 선발된다. 이들은 신분 자체가 낮고 화장실 들락거리듯이 대궐 입출입이 자유로운 유일한 여인들이라 입궁시기 자체를 기록하지도 않고 입궁이라는 표현 자체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머니의 신분 추승과 자신의 신분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영조를 생각하면 영조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1★ 숙종의 여인들과 남편감의 시각으로 보는 숙종의 인간미
숙종은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조정대신들의 한쪽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사화를 일으키면서 왕권을 강화시켰고 그 외 적지 않은 업적을 남김으로써 임금로서는 어느 정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남편으로서의 믿음은 별로 주지 못한 듯싶다.
숙종 시절에는 두 분의 대비가 있었는데 자의대왕대비 조씨는 남인세력의 중심이었고 헌렬왕대비 김씨는 서인세력의 중심이었다. 서로 밀어주는 당파가 달랐던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현렬왕대비 김씨가 자신의 첫 번째 며느리로 인경왕후 김씨를 국모로 간택했던 것도 그녀가 서인집안의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자의대비 조씨는 차선책으로 당시 자신의 대왕대비전 침방 나인으로 있던 보기 드문 미색의 여인이었던 나인 장씨와 숙종을 만나게 해주었고 나인 장씨 역시 임금의 성은을 입기 위해서라도 자의대비와 손을 잡고 남인 당파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나인 장씨가 자의대비가 계획적으로 숙종에게 접근시킨 궁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헌렬대비 김씨는 장씨가 후궁의 첩지를 받기도 전에 궁궐 밖으로 내쳐버린다. 오로지 임금에게 성은을 입고 사랑을 바라던 장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장씨는 인현왕후와 마찬가지로 인현왕후 이전에 헌렬대비 김씨에 의해 궁궐에서 내쳐졌는데 당파싸움에 연루되었던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다. 자의대비 조씨의 명으로 같은 남인 세력이었던 동평군 (인조대왕 손자)가 장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고 장씨가 궁궐로 돌아갈때까지 6년동안 보살펴주었다. 억울하게 내침을 당한 나인 장씨는 정치과 권력의 쓴맛을 겪은 후로부터 정치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순수성을 버리고 변하게 되었다.
그 사이 헌렬왕대비와 인경왕후가 모두 승하하고 다시 서인세력은 자신의 집안에서 다시 중전을 간택하는데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고, 명성왕후로 추존된 헌렬왕대비 3년상이 끝난 후에 자의대왕대비 조씨의 명으로 나인 장씨는 6년만에 다시 입궐하게 되어 비로소 숙원의 첩지를 받게 된다.
이미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정치계의 쓴맛을 제대로 겪은 숙원 장씨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노력하였고, 아들을 낳아 자신의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려는 야심까지 가졌다. 그렇지만 뜻대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인현왕후를 계속 모함하면서까지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숙원 장씨에게 계속 모함을 당한 인현왕후는 숙원 장씨가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와 숙종의 총애를 빼앗기 위한 차선책으로 서인 집안의 다른 여인이었던 김씨를 숙종의 후궁으로 낙점하여 숙의의 첩지를 내렸다.
그렇지만 숙의 김씨 역시 후궁이 된 지 2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였고, 결국 숙원 장씨가 1688년 먼저 임신하게 되어 소의의 첩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경종이 되는 균을 낳았다. 다음 해인 1월 11일에는 균이 원자로 봉해지고 1월 15일에는 정1품 빈의 첩지를 받아 희빈이 되었다.
그렇지만 균을 원자로 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정권을 장악한 서인대신들의 강력한 반대가 생기자 숙종은 반대한 서인대신들을 모두 내치고 서인집안이었던 인현왕후까지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와 서인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폐위시켜 버렸다. 그리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봉하였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기사환국 사건으로 인하여 이번에는 인현왕후 민씨가 당쟁의 희생량이 되어 5년 동안 사가에 나가 살게 된다.
그렇지만 5년 후에 숙종은 남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재등용 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갑술환국의 원인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한 차선책이라는 설이 많지만 이는 서인의 입장에서 적은 인현왕후전과 야사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고 정사인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실제 내용을 봤을 때에는 숙종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서인과 남인의 세력의 균형을 위해 숙종은 환국을 두 번이나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왕비가 되었던 중전 장씨도 억울하게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숙종은 자신의 권력유지와 정치적인 계산을 위해서는 자신의 여인들의 희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임금이었을 뿐이었다.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는 어느 한쪽이 못되고 어느 한 쪽이 착하다고 할 문제가 아니라 두 여인 모두 숙종에게 이용된 당쟁에 의해 희생된 여인들이라고 해석해야 올바를 것이다.
숙빈 최씨도 마찬가지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숙빈 최씨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결국 숙빈 최씨의 입지와 권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다는 신당을 차렸다는 고변으로 희빈 장씨를 제거하여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렇지만 숙종은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서인의 영수로 급부상한 숙빈 최씨를 견제하기 위해 그녀를 출궁 시키기로 마음먹고 이현궁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한편 새로운 중전을 물색하였고, 이현궁 공사가 완료되자 그녀를 출궁 시켜 버렸다. 숙종의 입장에서 보는 숙빈이라는 존재는 희빈을 견제시키고 희빈을 사사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숙빈 같은 경우는 무수리 출신이라 숙종 입장에서는 인생에 있어 옥의 티로 여겼을 수도 있다. 그녀에게 성은을 내린 것은 한때의 실수라고 말한 내용이 실제로 기록에 남아있다는 점을 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짐작할 수 있다.
숙종의 여인들이었던 인현왕후, 숙빈, 희빈은 어디까지나 숙종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또 다른 근거로 숙빈은 서인세력의 지지를 받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숙종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게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서인 입장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 만큼은 별로 서인들에게 영향력도 없었고 숙종에게 큰 견제가 될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숙빈이 출궁된 후에도 영빈 김씨 만큼은 계속 궁궐에서 남아 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리고 희빈과 인현왕후의 지위와 목숨은 숙종의 처신에 따라 충분하게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경종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지 않았더라면, 추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어머니인 희빈을 대비로 추존하였을 것이고 인현왕후는 이미 자연스럽게 왕대비가 되어 두 여인 모두 대비가 되어 희빈 장씨도 추후 왕후의 존호를 받았을 것이고 인현왕후도 오래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성종 대에 소혜왕후와 안순왕후의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숙종이 좀 더 현명하게 처신을 했었다면 두 여인의 인생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숙종은 왕으로서 왕권강화를 위해 힘을 썼던 조선의 몇 안 되는 군주인 반면 남편감으로는 크게 믿음을 주지는 못한 군주로 보일 뿐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숙빈 최씨가 죽기 4개월 전인 1717년 12월, 희빈 장씨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숙종은 상소를 받아들여 예조참의로 하여금 지사로 이름난 자 10여 명을 대동하여 1년 간 기내(畿內) 길지(吉地)를 간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였다.
이 시기는 숙빈 최씨가 죽었던 1718년 3월과 중복되는데 1718년 한 해 동안 숙종은 숙빈의 묘소자리에는 냉정한 처분을 한 반면, 희빈 장씨의 이장을 위해서는 와병 중에도 불구하고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희빈은 세자의 생모라 당연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희빈은 당시 노론으로 구성된 대신들의 반발이 많았고 숙빈은 노론들이 지지하던 세력이라 노론의 지지를 받았던 여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은 숙종의 강력한 의지에서였다.
다음 해인 1719년에 치러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하였는데 그 대접이 숙빈과는 전혀 달랐다.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장리(仁章里)에서 영구(靈柩)가 발인(發靷)하여 진해촌(眞海村) 신산(新山)으로 향하였는데,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빈(世子嬪)도 궐내(厥內)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45년 4월 5일 기사』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경종)가 정사를 보던 경현당에서 망곡례를 하는 것을 맹비난하던 노론은 경현당은 대리청정 업무를 보는 곳으로 곧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는데 세자의 사친(희빈)을 위한 예절이 지나치다고 비판하였지만 숙종은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이러한 숙종의 처사는 숙종의 사후에도 논란이 되어 영조시대에도 경종이 숙종의 적자이며 희빈 장씨가 숙종의 제2계비로 기록한 서적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경종이 즉위한 후 유학 조중우는 숙종의 처사가 아들인 경종이 희빈 장씨를 추존하라는 은밀한 뜻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덕의(德義)는 효행(孝行)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밝은 훈계이며, 어미가 아들로서 존귀(尊貴)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었는데, 낳아 주신 어버이는 오히려 명호(名號)가 없이 적막한 마을에 사우(祠宇)는 소조(蕭條)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황량(荒涼)합니다. 문무 조신(文武朝臣)의 2품관도 오히려 증직(贈職)의 영전(榮典)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써 유독 낳아서 길러 준 어버이에게는 작호(爵號)를 더함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지극한 정리(情理)를 펴겠습니까? 신이 기억하기로는 지난날 선대왕(先大王)께서 전하의 정리를 통촉하여 특히 천장(遷葬)을 허락하셨고, 전하의 뜻을 살피셔서 다시 망곡(望哭)하게 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선대왕의 척강(陟降)하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 1 책을 보니, 전후의 찬집(纂輯)에 있어 모두 품의하여 예재(睿裁)하였는데, ‘희빈(嬉嬪)’ 두 글자를 일찍이 삭제하지 않았으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어찌 그 사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특히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빨리 명호(名號)를 정하여 지극한 정리를 펴고 나라의 체통을 높이소서.” - 경종 1권, 즉위년(1720 경자 / 청 강희(康熙) 59년) 7월 21일(병술) 2번째 기사
그렇지만 경종이 일찍 죽자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고 영조가 즉위한 후에 노론은 숙종의 처사를 다시 거론하며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교리(校理) 김진상(金鎭商)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사친(私親) 964)을964) 천장(遷葬)할 때에 망곡(望哭)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었는데, 신축년 965)에965) 대신(臺臣) 이제(李濟)가 신의 죄를 추론(追論)하였습니다. 대체로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비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쫓겨난 어미를 위하여 상복(喪服)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어미가 쫓겨나면 아비와의 관계가 끊겼으며, 아들은 아비의 뒤를 계승해야 하므로, 상복을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왕조(王朝)의 예절은 필서(匹庶)에 비교하여 더욱 엄격하며, 신사년 966)의966) 사건은 또한 어미를 내쫓는 데 비교할 뿐만이 아니니, 그 당시 시마복(緦麻服)을 입게 한 제도로 이미 《예경(禮經)》의 정의(正義)를 잃은 것이며, 임오년 967)967) 초기(初朞) 968)때에 이르러 성고(聖考)께서 곡(哭)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망곡(望哭)하는 예(禮)를 행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초기 때에도 오히려 곡을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개장(改葬)할 때이겠습니까? 가령 말하기를, ‘예법으로 막는 것이 아무리 엄격할지라도 사사로운 은혜는 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대내(大內)에서 곡을 하여 지정(至情)을 펴는 것은 혹시 가하겠지만, 만약 궁관(宮官)과 대조(大朝)의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의식을 베풀며 망곡 하여 예절을 차리는 것은 결코 그것이 불가한 줄 압니다. 신이 글로 논한 것은 다만 은미할 때 방지하려는 뜻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바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예절에 지나친 예절을 하지 말도록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이미 저지당하였고 뒤에 또 근거가 없는 말로 명예를 손상시켰으며, 마침내 의리를 없애고 아첨을 바치는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서 여럿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휘호(徽號)를 짓자고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한 몸의 사사로운 욕심을 성취시키면서 우리 임금을 예절에 어긋나는 데로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반드시 깊이 혐의스럽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영조 4권, 1년(1725 을사 / 청 옹정(雍正) 3년) 3월 25일(계해) 4번째 기사
실록에 기록된 정황으로 볼 때 영조가 즉위를 못하고 경종치세가 이어졌다면 숙빈 최 씨는 사후 폐서인이 되고 연잉군도 역모로 처형될 수도 있었고 희빈 장씨의 경우에는 경종의 의지와 소론세력의 지지를 얻어 충분히 다시 왕후로 복위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경종만 병약하지 않고 오랫동안 치세를 유지했었다면 후대에 희빈 장씨에 대한 평가도 전반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2★ 숙빈의 출생과 조선왕실의 데뷔과정! 그리고 파란만장한 인생!
조선의 역대 후궁 중에서 숙빈 최 씨만큼 신데렐라 인생을 겪은 후궁은 없었다. 그전에도 노비나 기생이 후궁이 된 적은 있었지만 낳은 아들이 제왕이 된 일은 조선역사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는 영의정으로 추존된 최효원의 딸로 출생지는 여러 설이 떠돌고 있는데, 영조실록에 의하면 1670년 음력 11월 6일에 여경방 (현재의 세종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최효원은 1638년(인조 16년) 2월 23일에 태어나 1672년(현종 13년)인 35세에 사망하였는데 그 당시 최씨는 3살이었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1639년 10월 17일에 태어나 1673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숙빈 최씨의 부모는 사후 양주 신혈리 곤향언덕에 합장했다가 나중에 다시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101-1번지에 묘가 이장되어 있고 생년월일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마저 최씨가 4살때 죽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당시 그녀의 오빠는 10살이었고, 언니는 6살이었는데 고아가 된 3남매를 거두어 준 사람은 외조부였던 홍계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흔히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때까지의 그녀의 전직은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어 드문드문 남아있는 자료로 짐작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역사학자들도 숙빈 최씨의 전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낸 자료가 없어 쉽게 언급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9년~2010년 사이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총 5권으로 구성된 숙빈 최씨 자료집을 출판하였는데, 현재까지의 자료 중에서 숙빈 최씨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도서에서도 숙빈 최씨의 전직에 대해 명확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최씨의 전직은 크게 세 가지로 짐작되고 있는데 첫 번째로 무수리설, 두 번째로 침방나인설, 세 번째로 침방나인 각심이설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설은 무수리 설로 소설이나 드라마화하여 많이 소재로 넣고 있는데, 이는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의 성격과 매치가 되어 많이 집어넣고 있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설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침방나인설이 있다. 궁녀도 맡은 직책이 있는데 침방의 나인의 경우 내명부 궁녀 서열 중에서 지밀 궁녀 다음으로 두번째로 높은 서열에 속한다. 너무 높은 나인의 서열에 있기 때문에 영조가 콤플렉스를 받을 이유가 없다며 부정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침방나인설은 영조의 직계후손인 고종황제가 내세운 설로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내용을 1987년에 일지사에서 출간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80쪽에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어느 날 어머니 숙빈에게 옛날에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는데 침방에서 일할 때 누비옷을 만드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들어 그 이후부터는 누비옷을 절대로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고종은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종은 영조의 직계후손인 만큼 역사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세 번째로 침방나인 각심이설인데, 각심이란 궁녀의 하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보다 낮은 직급이다.
각심이설도 역시 김용숙 선생의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한중록 연구(개정증보판)" (정음사, 1987년, 209쪽)에 나오는데, 각심이는 궁중에 붙박이로 일하는 여종으로 궁녀의 시종을 드는 사람이다.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 각심이었다면 영조가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숙빈 최씨에 대한 과거 자료들의 대부분은 영조가 내세우고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인데, 근거가 부족하고 최대한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에 대한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현재의 서울 세종로 일대)이다. 서학동은 말 그대로 서부의 학교 서학이 있는 동네로서 여경방에 속한 곳이었다. 영조는 이곳 생가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으니 꽤나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숙빈최씨를 위해 별도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세우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등 추숭 작업을 마무리 한 뒤에 뒤늦게 생가 복원을 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육상궁이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 생가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역사연구회에서 발췌해 온 내용이다.
두 번째로, 영조는 어머니를 위해 즉위 원년에 신도비를 만들었는데,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도 신빙성이 없고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는데 다음과 같다.
1. 숙빈 최씨는 7살에 궁궐에 입궁하였다.
2. 숙빈 최씨는 병환이 들어 자청하여 1716년에 궐을 나갔다.
7살에 입궁을 했다는 뜻은 숙빈이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것과 같다. 궁녀로 입궁하는 평균나이가 7살이기 때문에 숙빈이 궁녀로 들어왔다는 것을 영조가 강조하기 위해 돌려 말해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평생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 동안 콤플렉스를 가졌고, 대신들도 항상 영조 뒤에서 천한 핏줄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왔었다.
그리고 숙빈 최씨가 병환이 들어 자청해서 1716년에 궐을 떠나 이현궁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후궁이 와병 중일 경우 잠시 사저에 나가는 일이 있지만 그 뒤로 영원히 궐로 돌아오지 않아 이 부분도 미심쩍지 않다. 대부분 역사학자들도 신도비 내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숙빈이 언제 궐을 나갔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1716년 출궁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숙종은 1711년 6월 22일 자로 이현궁을 환수하고 가례를 올린 연잉군 사저로 옮기라고 명한 숙종실록의 기록이 있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은 1711년 6월까지 이현궁에서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신도비 기록이 영조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가장 유력하게 보는 전직은 무수리인데 무수리는 궁녀가 아니고 궁궐을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직업을 가진 여인이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도 허드렛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직업이었고 무수리는 출퇴근하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입궁 기록 자체를 남기지 않는다. 또한 천한 직업인 만큼 영조도 충분히 콤플렉스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7살에 무수리로 입궁한 후에 추후 나인으로 승격되었다고 하는데, 7살에 무수리로 궁궐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수리는 허드렛일은 기본이고 무거운 물동이도 나르고 잡일에 기술과 요령이 있어야 하는데 궁궐에서도 이런 살림 요령이 있는 나이있는 여인들을 주로 무수리로 선정했기 때문에 7살이 무수리를 한다는 것도 그것도 궁궐에서 무수리로 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침방나인도 많이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영조와 직계후손인 고종이 주장하는 주장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의견들도 있고 일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침방나인 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침방나인이 궁녀 중에서도 서열 2순위라 영조가 콤플렉스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침방의 일은 어린아이도 잔심부름 등 할 일이 있고, 지밀나인 다음으로 왕족을 가까이 모시기 때문에 임금의 승은을 입을 확률이 다른 처소보다 많고, 설사 승은을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왕족들을 자주 대하기 때문에 숙종에게도 눈에 익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이었다는 작은 확률로 가정한다면, 인현왕후전의 침방 나인으로 있으면서 인현왕후를 섬겼고 임금도 중궁전에 자주 들락거리는 만큼 숙종에게도 얼굴이 익힌 궁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숙종이 최씨에게 성은을 내린 이유도 그녀의 얼굴이 낮이 익어 물어봤을 것이고 예전에 침방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성은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궁녀들은 마음만 먹으면 궁궐 내에서의 임금의 동선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숙종의 성은을 입은 것도 그녀가 숙종의 동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하여 성은을 받은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침방나인 출신이었다면 인현왕후가 중전에 책봉된 숙종 7년(1681)을 전후한 시점에 중궁전(왕후의 처소)의 생각시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보이고, 궁궐의 관행대로 18세가 되던 숙종 13년(1687)에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거쳐 중궁전의 정식 시녀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중전 자리에 오른 숙종 15년(1689)에 20세의 최 숙빈은 원래의 침방으로 복귀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고 그녀가 정치계에 데뷔하는 과정도 좀 더 쉬울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각심이 설인데, 각심이 설을 믿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가 영조가 어머니 신분 콤플렉스 때문에 재위 52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는데 최씨의 신분이 각심이 정도는 되어야 콤플렉스를 가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의 무수리와 비슷한 동급으로 보면 된다.
숙빈이 7살에 입궁한 것이 가장 핵심인데, 사실이라면 7살에 침방나인으로 입궁하여 인현왕후전의 처소에 있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같이 궁궐을 나와 자유신분이 되었다가, 서인들이 자유신분이 된 최씨를 궁궐 출입이 자유로운 무수리로 재입궁시켜 사씨남정기를 퍼트리고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다.
궁궐에서 모시던 왕족이 폐출을 당하면 궁궐에 남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같이 궁궐을 떠날 수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숙빈 최씨도 같이 궐을 떠나 인현왕후를 돌보는 시녀로 있다 서인들과 손을 잡고 무수리로 재입궐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수리는 힘 좋고 요령 있는 여인들 위주로 뽑는 거 외에는 특별한 선발작업도 없을뿐더러 다른 궁녀들과는 달리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서인세력들은 최씨를 사전에 포섭하여 무수리 겸 첩자로 이용하였고, 이미 인현왕후를 섬겼던 최씨도 서인들의 요구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서인세력의 충견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씨남정기는 궁궐에서만 퍼진 소설로 소설 내용으로 봤을 때 의도적으로 서인세력이 궁궐 내에 퍼트린 소설인데, 실제 이 소설을 궁궐로 가져온 여성은 서인들의 사주를 받은 최씨로 보인다. 최씨는 궁녀출신이라 궁궐 지리에 대해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들도 최씨를 가장 적합한 인물로 봤을 것이다.
그리고 최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뒤에 연잉군을 낳고 서인 세력들이 그녀 주변에 모여들었던 이유도 최씨가 아들을 낳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오래전부터 서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궁이 된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최씨가 서인사람이 된 것도 그녀가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를 모셨던 이유가 첫 시발점이 되었을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숙빈최씨 신도비 기록이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이라 객관성이 떨어져 7살 입궁설은 100% 믿을 수 없다.
숙종과 숙빈 최씨가 처음 만난 계기도 현재로는 야사인 수문록에 의존하고 있는데, 수문록은 정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야사이므로 고지고대로 믿을 수 없다. 두 사람이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난 것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야사이고,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도 적합해서 그대로 재연하는 경우가 많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야사는 근거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최근에는 역사전문가들이 유튜브나 TV에서 수문록의 첫 만남 내용을 진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왜 그런식으로 말하는지 되물어보고 싶다.
숙빈이 처소에서 인현왕후를 위한 생일상을 차리다가 숙종을 만난 내용은 야사인 수문록에 있는 내용인데, 수문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 증명하는 사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무수리 시절에 최씨가 임신하였을때 중전 장씨에게 끌려가 문초를 받고 정신을 잃은 최씨를 중전 장씨가 장독에 가두었다는 내용이 수문록에 전해지는데, 이때 숙종이 우연히 중궁전에 발걸음하다 장독을 열어보니 최씨가 갇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태아도 무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에 불과하다. 아무리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용종을 잉태한 여인은 아무리 중전이 투기심이 심하다고 해도 절대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후궁의 첩지는 임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전이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정황상 중전 장씨는 최씨가 미덥지 못하더라도 용종을 잉태했기 때문에 숙원의 첩지를 내렸을 것이고 숙원의 첩지를 내리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었겠지만 결국 숙원의 첩지를 내렸다는 것은 그녀를 숙종의 후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수문록의 내용은 희빈 장씨가 사약을 마시고 죽자 악취가 심해 궁 밖에 내다버렸다고 하는데 이 내용 자체도 어패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숙빈에 대한 모든 일화는 서인세력에 의해 지어낸 내용들 위주라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숙종도 숙빈의 실체, 즉 숙빈이 서인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 그리고 숙빈이 서인들의 중심세력이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자 희빈 장씨 일이 마무리된 후에 내쳤을 가능성이 높다. 멀쩡하게 총애하던 후궁을 내쳤을 이유도 없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숙빈이 죽고 장례절차를 할 때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처신할 이유도 없다고 보인다. 묘자리를 잘못 정해서 올렸다고 해도 잘못을 지적하고 다시 알아보라고 하면 될 일을 굳이 파직하고 귀양까지 보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숙종이 숙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더더욱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시기는 희빈 장씨의 묘가 이장되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와 중복되는데 숙종은 병환중임에도 불구하고 예조판서에 명하여 최고의 명당자리를 알아보라고 지시할 정도로 같은 시기에 희빈과 숙빈의 묘자리에 대한 처우가 상이하게 달랐다. 두 여인에 대하는 처신이 상이하게 다른 이유가 희빈의 죽음이 숙빈과 연관되었음을 알고 그녀에 대한 총애가 완전히 식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숙빈이 이현궁으로 출궁 후에도 그 흔한 서찰 한통도 왕래도 없었으며, 새벽에 암행을 즐기던 숙종이 이현궁 근처를 지나갈 때도 들어가서 숙빈을 만나기는커녕 그냥 지나가기만 했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조는 숙빈 출궁설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통성을 위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위에 언급한 기록들은 모두 조선왕조 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아무리 임금이라도 실록청의 내용은 함부로 열람하거나 삭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실록청의 고유 권한이다. 그래서 위에 기재된 숙종실록에 있는 내용을 영조가 보지도 삭제하지 못한 이유이다.
영조는 재위 52년 평생 동안 막강한 권력을 시행한 임금이었지만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실록의 기록을 열람할 수도 고칠 수도 없고 어머니인 숙빈을 왕후로 마음대로 추존할 수도 없었다. 임금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마저 무시하고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임금이 연산군이었다. 비록 연산군은 폭군으로 묘사되고 군으로 강등되었기는 하지만 역대 조선 제왕 중에서 재위기간 동안 법을 어기고 가장 임금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임금이다. 실록청 기록도 열람, 수정도 모두 직접 관여까지 한 임금이 연산군이었다. 이때까지 임금들이 마음먹고 하지 못했던 모든 생각들을 연산군은 모두 과감하게 시행하여 결국 폐출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다시 영조로 돌아와서, 영조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하고 싶었지만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여러 존호만 붙이고 육상궁(추후 수빈 박씨가 추가되어 칠궁으로 개명)에 합사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노론은 서인에서 갈라진 당파로 영조를 지지하던 세력이었지만 임금도 모자라 천한 무수리 출신의 왕후까지 종묘에 모실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조가 왕이 된 건 자신들의 권력유지 때문에 부득이하게 왕으로 추대한 것이었지만 숙빈까지 왕후로 받아들여 종묘에 올린다는 것은 노론들 조차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종 즉위 후 희빈 장씨를 왕후로 추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소론세력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물론 희빈은 중인집안이었기 때문에 숙빈과는 비교대상이 아니었지만 무수리를 어머니로 둔 영조를 왕으로 추대할 정도였다면 서인들도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숙종이 희빈 장씨를 죽이기 전에 후궁은 왕비가 되지 못하게 정한 국법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숙빈 최씨는 서인 세력에 의해 정치적인 계산으로 만들어진 후궁으로 봐야 할 것이며, 그녀 역시 서인이라는 당쟁에 휘말려 훗날 숙종에게 내쳐지는 인현왕후, 희빈 장씨 다음으로 또 한 명의 비련의 여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1 ※
숙빈 최씨는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라는 제목으로 제 블로그에 예전에 올린 글이 있으므로 같이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숙빈 최씨는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 나의 멋진 블로그 (tistory.com)
숙빈 최씨는 왜 왕비가 되지 못했을까?
블로그 이전으로 네이버 블로그에 작성했던 게시물을 티스토리에 이동하였습니다. 앞으로 올라오는 게시물은 티스토리로 올리겠습니다. 원래 왕비의 자리가 비어 다음 왕비 자리를 정할 때에
patrica.tistory.com
※ 참고자료 2 ※
숙빈 최씨의 말년 이야기가 뉴스기사로도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5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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